배려라는 이름의 통보

산바카라 후 식사 vs 식사 후 산바카라

by이뻔뻔

근황 토크가 몇 차례 오가다가 그가 먼저 본론을 꺼내놓았다.


“우리 다음 약속은 언제 잡을까요?”


이어진 문장은 예상을 빗나갔다.


“제가 이번 돌아오는 주말에는 선약이 있어서요. 그다음 주말에 만나는 건 어때요?”


2주 뒤라...


순간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첫번 째, 의아함이었다. 주말이 이틀인데 그 중 단 몇 시간도 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선약일까.


두번 째는 바로 귀차니즘이었다. 마흔 살 먹은 나의 지독한 게으름. 한 주 쉬어간다는 사실이 내심 반갑기도 했다. 나는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버티는 이유는 오직 주말 휴식이다. 약속을 잡고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1년에 몇 번 없는 즐겁지 않은 노동이기도 했다.


“주말에 바쁘시군요.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아쉬움보다는 다가올 주말의 완벽한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친구랑 연락하다가 이 일화를 털어놓았다.


“좀 별로다. 원래 남녀 관계라는 게 초반에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듯이 확 밀어붙여야 되는 거잖아. 첫 만남 이후에 바로 보고 싶어해도 모자랄 판에 2주에 보자는 건...”


친구의 말이 백번 천번 맞다. 없는 시간도 쪼개 서로를 보러 달려가던 이십 대의 불같은 연애 기준에서 보면, 그의 2주 뒤 약속은 관심 없음인 것 같다.


'나한테 마음이 별로 없나...'


하지만 그 씁쓸함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지 못했다. 늦잠 자고, 헐렁한 티를 입고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면서 뒹굴거릴 나의 주말의 행복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말의 안락함을 정체 모를 불확실한 감정 때문에 내팽개치지 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의 일반적인 연애 패턴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엔 내 나이 마흔, 그리고 그의 나이는 쉰. 우리는 어쩌면 인생의 절반을 이미 통과했다. 서른만 되어도 연애에 목숨 걸지 않는데 쉰이라는 나이는 오죽할까.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나이에는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2주 뒤로 밀려난 약속에 대한 서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가 자주 가는 곳이 있긴 한데요. 거긴 요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기 좀 힘들 것 같아요.”


가기 힘들 것 같은데 굳이 왜 말하는거지 싶으면서도 그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거기가 어딘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이에요.”


국림중앙박물관은 내가 세달 전 쯤 가봤던 곳이다. 민수씨가 구여친과 데이트하던 곳인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기 힘들 것 같다는 말로 봐서는 나와 그곳에 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나는 먼저 장소 제안을 했다.


그곳은 여의도.


전에 성수동은 그가 나를 배려해서 잡은 장소였기에, 이번에는 내가 그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고 싶었다. 여의도는 자주 가지는 않지만 1년에 한 두 번 쯤은 가는 곳으로 나에게는 아주 낯설지는 않은 곳이다. 내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고, 여의도의 음식점 링크 2개를 복사해서 그에게 보냈다. 한 군데는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였고, 또 한 군데는 민수씨와 소개팅이 잡히던 날 갔던 음식점이였다. 민수씨에게 두 개중에 골라보라고 말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게 되었다.


“저번에 민수씨가 사주셨으니 이번 저녁은 제가 살게요! ”


만남의 동선을 짜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견은 또다시 미묘하게 엊갈렸다. 그는 여의도 주변을 가볍게 산바카라하며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식사를 먼저 하고 나서 여의도를 돌아보자고 말했다. 사실 내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주말에 미리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약속 장소에 나가면 아마 이른 저녁때쯤이 될 것 같았다. 어딘가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식당으로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애매했다. 게다가 내가 고른 그 식당은 예약이 불가능한 워크인 전용 매장이었다. 주말 피크 타임에 웨이팅을 해야 할 게 뻔했다. 웨이팅을 하지 않기 위해 식당 오픈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산바카라 후 식사를 원했고, 나는 식사 후 산바카라을 고집한 것이다.


결국 내 뜻대로 되긴 했지만, 이상하게 개운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순서의 차이였음에도 서로의 의사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겉도는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치고 차분해진 머리로 방금 전 대화창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딴에는 배려랍시고 여의도로 장소 정하고, 식당도 골라보라고 보냈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식당으로 정했다. 계산도 내가 하겠다고 선포하고 데이트 코스도 내 위주였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니 이건 배려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를 연속으로 받은 기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가고, 이거 먹고, 이때 밥 먹고 돈도 내가 낼꺼니까 당신은 몸만 오라는 통보.


세상에는 백인백색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수고로움을 덜어줬다고 좋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 행동이 별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에서 이런 식으로 과속 페달을 밟으며 내 뜻대로만 밀어붙인 건 민수 씨와의 만남이 처음이었다.


물론 나의 이런 행동 밑바탕에는 나름 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깔려 있었다.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 하지만 다시보니 고집세고 배려없게 느껴졌다. 배려심과 이기심은 한끝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이 사람 앞에서는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짓을 했을까. 괜히 잘해보고 싶어서, 배려해 준답시고 혼자 섣부르게 설치다가 꼬이게 만든 것 같다. 배려라는 이름의 일방적인 통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월요일 연재
이전 11화또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