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암이래

by고들정희

암 확정판정을 받은 후, 누구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릴지 잠깐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알리기 전, 북클럽 사람들 몇 명에게 자연스럽게 오픈했다. 매주 수요일 내 일상의 일들을 글을 써서 함께 공유하는 글쓰기 멤버들이 있다. 그런데, 조직검사 결과가 마침 수요일에 나와서 내 검사 결과를 글로 쓰게 되었다.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아픔을 겪게 될 때 큰 힘이 된다. 그 멤버 중 한 명인 지혜가 나와 친한 지인들 몇몇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언젠가는 다 알게 될 일이겠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지혜가 대신해준 것 같아 오히려 고맙다.


내가 처음으로 전화로 소식을 알린 사람은 하와이에 사는 내 친구 J 다. 이 친구는 7년 전 유방암을 겪고 수술을 한 경험이 있다. 수술 후 5년간 약을 복용했고 이후에도 암검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당시 0기였음에도 완전히 절제 수술을 해서라도 예방을 하고 싶어 했던 친구였다. 그래서 수술 후 통증은 어떤지, 어떤 식으로 진행했었는지도 궁금했다.
내가 유방암이라고 하자 친구는 내가 혹시라도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어할까 봐 "정희야, 나한테 전화 잘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큰 파도가 몇 번은 오잖아. 그럴 수 있다. 수술하면 되고, 되도록이면 의사 선생님이 추천하는 방법대로 꼭 진행해"라고 했다. 나는 내 마인드는 너무 강하다며 두려운 건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암 걸려도 요즘은 다 수술해서 낫더라며 오히려 내가 친구를 위로해 주었다. 친구는 암을 겪으며 그동안 내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반성을 했고, 식단과 운동 및 모든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케이스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철저했다. 나에게는 커피나 유제품조차도 먹지 말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상관없고 괜찮다는 말도 있지만 유방암에 안 좋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냥 안 먹는 게 낫지 않냐? 면서, 아침에는 커피 대신 그저 따뜻한 물을 마시라며 네가 수술하기 전까지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잔이 나를 깨운다고 생각하며 사는데, 그걸 끊으라니 가능할까 싶다가도, 그래.. 뭐든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좋아서 먹는 것이라도, 안 먹어야 할 때 그걸 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하루에 연한 커피 한잔은 오히려 괜찮을 거라며 혼자 결론을 내려본다.


그다음은 친정언니에게 알렸다. 큰 수술이 아닐 수도 있고, 다들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고 예후가 좋다는 말들을 해주고 있으니 엄마에겐 굳이 알리지 마라고 했다. 나중에 수술이 다 끝나고 회복이 어느 정도 되어 알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신앙심이 철저해 좋은 일이 있으면 내게 늘 "할렐루야"를 카톡으로 보내곤 하는 언니는 교회에 있다가 내 이야기를 듣게 되어 주변에 기도 요청을 하고 난리가 났다. 교회도 안 다니는 내게 기도문을 캡처해서 보내고, 내가 보지도 않을 주일 말씀 영상을 보내준다. 역시 못 말리는 언니다.
마지막에는 "울 어메이징 동생 파이팅"을 외친다. 하트 이모티콘과 함께.


남편에게는 처음부터 전혀 진행 과정에 대해 말을 못 했다. 요즘 주말에만 캘거리에 오는데 멀리서 일하는 사람에게 걱정거리를 주는 것 같아서 조직검사를 했다는 것도 숨겼다. 그런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고 말해야 할 판이 되었다. 토요일 점심에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세 아들과 남편을 불러 거실에 모였다.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암 판정을 받고도 담담했는데, 가족들에게 암이라는 말을 꺼내야 하니 갑자기 심장이 막 떨렸다.
"내가 암에 걸렸어."
그 말을 밖으로 내뱉자마자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구 하나 울어주면 좋았을 텐데 정작 말하는 내가 울고 있다. 이건 내가 원했던 그림이 아닌데..
남편도 아이들도 놀란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나에게 혼날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잔소리가 시작된다. 관절염으로 엄지 손가락도 아프니 엄마가 뭘 부탁할 때는 싫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도와달라, 각자 방 청소는 알아서 잘해라, 엄마가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니 되도록 스트레스를 없게 해 줘, 앞으로도 너네 몸을 사랑하고 자기 몸에 나쁜 것을 넣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라 등등 암과 관련 없는 말들이 이어진다. 남편에게도 이제 혼자서 매일밤 맥주 마시는 습관은 좀 고치라는 둥 마치 술 때문에 암 걸린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결국 혼자 울고, 혼자 연설을 하다가 그냥 "해산"을 외쳤다.


저녁에 남편은 뭘 찾아봤는지 방으로 와서는 암이 있을 때는 무조건 와이프랑 동행하고 처음부터 함께 해야 한다더라며, 일하는 현장을 캘거리로 옮겨 달라는 신청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아직 스케줄도 안 잡혔는데 미리 행동하지 마라고 했다. 남편이 있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나는 정말 수술만 뚝딱하면 모든 게 끝날 거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 다운타운에 갔다가 자기 물건은 안 사고 예쁜 꽃다발을 사서 직접 포장한 거라며 나에게 주었다. "Happy everyday!"라는 메시지와 함께. 내가 "이거 암 축하 선물이야?" 라며 농담하니 씩~ 웃는 둘째. 이런 사소한 행동하나에 감동을 받게 된다. 대단한 게 아닌데도 그 마음이 전해질 때.

아들이 선물한 꽃다발


가장 친한 친구 K에게는 일주일이나 지나서 전화를 걸었다. 바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고르고 미리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 4명 중 나를 포함한 세 명이 유방암에 걸렸다. 졸지에 유일하게 K만 암에 안 걸린 사람이 되었다. 친구는 아침에 커피 한잔을 하려던 참이었고, 내가 암이라는 말에 "나 지금 심장 떨어질까 봐 붙잡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했다. 나는 내 이야기보다 친구에게 건강 검진 꼬박꼬박 잘 챙겨하라는 말부터 해주었다.
이젠 더 이상은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죽을병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죽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알렸다. 이젠 그 부담은 덜었다. 며칠 뒤 K는 카톡으로 "주말 내내 주정희 생각만 나고 속상하다. 나도 숙제였던 검사받고 괜찮다길래 의사 선생님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어. 유제품 먹어도 상관없대! 담담해 보여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 아침에 그릭요거트 먹어라! 맛나게!"


드라마에서 봤던 암은 주인공이 죽어야 할 때 걸리게 만드는 병이다.
주인공은 결정적인 순간에 말한다.
"나 암 이래..."
가족들은 울고, 쓰러지고, 눈물콧물 범벅이 된다. 배신했던 남자도 뉘우치고 돌아온다.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머리를 빗다가 한 움큼씩 머리가 빠지는 걸 보며 당황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연인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감는다.
내가 봐 온 암은 늘 누군가의 '마지막 회'를 위한 장치였다.
그래서 암은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멀리 있는 병이었다. 뉴스 속 누군가의 이야기 거나 드라마 속 주인공의 운명 같은 것. 적어도 내 인생의 대본에는 없는 설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암이라니...
자궁암 말기에 걸려 그간의 치료와 심정을 담아 쓴 어느 에세이 작가도 나처럼 암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도대체 왜 이 암이 생긴 건지, 왜 나에게 걸린건지 의사에게 물었다. 분명 내 탓이 있어야 했으니까.
의사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냥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내 탓은 아닐 수 있는 거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사고처럼 나에게 온 걸 꺼야.
내가 식습관이 엉망이었거나, 술을 많이 마셨거나,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몸을 소홀히 대한 대가라고 여기며 반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이지 나는 딱히 '걸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암은 잘못해서 받는 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정말 교통사고 같은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유를 찾는 일을 그만두니, 비로소 앞으로를 생각할 힘이 조금 생겼다.
몸은 느린데, 머릿속은 아주 바빠졌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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