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로부터

진화

by서희복

연필심을 곱게 갈아 종이 위에 수북하게 딱 봐도 피라미드처럼 쌓아 채울 준비를 한다.


두꺼운 종이에 새 모양을 그려 그 실루엣을 따라 잘라 내고 흰 종이에 뚫어진 새, 그 안을 검정 흑연으로 채우는 거다.


각자 알아서.


나는 한 마리의 참새를 그라데이션으로 얼룩덜룩 새까맣다가 회색도 있고 흰 부분이 그대로인 채 형상화했다. 내 안에 감각들이 고스란히 갇혀 억압되는 듯했고 다르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중학교 어느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커다란 떼로 날아오르는 참새들을 보며 전체를 보라고 하셨다. 그땐 내 결핍과 갈증이 내 세상의 전체였다. 뒤죽박죽인 그대로.


어떤 것은 까맣고 다른 것은 빨갛다. 파란 것들도 많고 회색인 것도 초록도 베이지도 노랑도 세상은 무한한 색깔이고 빛의 총합이다.

내면의 보이지 않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다른 농도들이 혼란스럽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 사람들과 세상을 채우는 것들이 가진 내적 컬러와 그 의미가 공존하려는 메타포로 삶이 뜨겁다. 그것을 깨닫는 건 항상 어떤 충돌로부터였다.


저항하는 힘만큼 멈추게 되고 멈추어 생각한 만큼 행동하게 된다. 그 어떤 내외의 조합과 그 조화도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기 내는 시간이다. 눈을 뜨면 흐린 회색의 새벽이 점차 채도를 높인다. 견고한 틀 앞에 멈추어 선다. 배재하는 힘에 맞서는 저항이 새롭게 창조하는 행위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곳에 가는 일은 그랬다.


'ㅎ'


모자를 꾹 눌러쓴 것 같은 첫 소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저 목구멍 깊은 곳, 소리의 문을 울리며 나오는 'ㅎ'이 내가 좋아하는 흰색에도 있고 내 이름에도 있고 먼 곳에서 바라만 보던 그곳을 우산처럼 품고 있었다.


바닥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어떻게든 딛고 나가 보자고, 나는 나를 떠밀었다. 한 번 용기를 접었다가 두 번 두드릴 뻔하다가 세 번째쯤 미치자 했다. 여러 번 나 자신을 설득한 끈적한 광기, 그 첫 색깔 #FF2400, 강렬한 선홍빛 주홍색이다.


다정하다는 유혹에 오래 가지고 있던 어떤 평화의 색을 기대했다. 아무것도 모르므로, 사람이고 싶었으므로, 아무도 모르는 사람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런 안전지대를 원했으므로. 경기 난 아기처럼 푸릇하게 놀라기도 하고, 칭찬받은 아이처럼 괜히 붉어져 수줍기도 했다.


'다정'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거친 눈물이 되고 그걸 마시며 점차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글 쓰는 사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제대로 읽는 사람으로 다시 나고 싶었다.


영화라는 사유를 존재와 이어가며 하나하나의 사람이 지닌 여러 향기들이 각각 고유하게 남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대끼며 만나게 된 진실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본연의 온도와 색깔들에 대해서도.


글의 온도가 글을 쓴 사람의 체온을 넘긴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넘어선다는 의미라 여긴다. 매번 미적지근한 못마땅함 속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여오고 있는지. 자신을 알아보는 눈, 점차 뜨거워지는 심장을 쥐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법을 익힌다.


같이 하는 마음들이 품은 의미와 고뇌에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 바라보는 것, 귀 기울이는 것들이 서로를 받친다. 그 직조되는 유형무형의 본질은 세상을 향해 연대하고 연결하는 모든 빛이다. 그 빛이 내는 무한한 색깔이다.


자연의 빛이다.

자연스러운.


그곳 사람들이 흘러 내게 와 산의 무한한 초록이 된다. 수많은 초록이 하나도 같지 않은 산이다. 바다도 파도도 하늘도 구름도 산처럼 그렇다. 매번 다른 색깔로 존재의 본질을 기꺼이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