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예술] 짧은 소용돌이 속에서

by서희복

영화 포스터를 보다가 두 줄의 줄거리를 읽고 말았다. 제목이 주는 묵직함을 찰나로 새겨진 그대로 들고 들어가곤 한다. 관람객이라는 빈 바가지로 영화 속에 깊숙한 감성들을 겪고 캐내 삶의 땔감을 얻어 쌓는 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도파민적 망상.

힘이 모이고 말이 모이고 글로 확정하는 반듯한 길을 따르는 그런 방식이 전부인 듯한 세상이다. 몇몇이 모여 평가하고 규정하고 상을 주고 찬사 하는 가장 비천한 낙인들이 눈이 멀도록 쨍한 칼빛이 된다. 존재의 철학이 나비넥타이나 머리핀 정도로 쓰이는 시대다. 몰려다니며 입이 하나가 되고 중독되고 잃고 죽어간다.


한국 영화 실낙원을 보려다가 멈춰 섰다. 이미 촉감하고 있는 그 순간을 살고 있지 않은가 전율이 일었기 때문이다. 오래 사라졌던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영화는 AI 판타지물일지도.


밀턴의 시도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도 연상호 감독의 영화도 내가 즐겨 듣는 한 AI 가수의 목소리와 겹치며 '금기'라는 양심의 가바카라으로 이끈다. 어떤 위험하고 위협적인 경계를 벗어나는 일에 대해 인간적인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 엔딩을 열어 두고 마치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주지만, 보이지 않는 내적 억압으로 뒷걸음치도록 하는 교묘한 덫들을 알아 챈다.


인간은 이토록 타락했다며 깨버린 금기를 신성시하고, 그렇게 욕망했다면 당연시되는 삶의 끝, 그 종말을 아는 것에 대한 다층적 고뇌가 단지 개인이 결정한 것이 아닌 역사적, 슬롯적 억압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는 상관없는 것인지 자문해 본다. 벽은 두꺼워지고 더 견고해진다. 그렇게 자신이 쌓은 돌탑 사이에 기어들어가 비슷한 자신들을 모아 세상을 쥐려 한다. 그게 타락이지.




생존에서 생계로 이어져 좋아하는 일이라는 빈틈없는 최면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할 일들이 눈에도 보이고 머릿속에도 가득하다.


하필 이런 때 딴청에 들어온 영화 제목과 포스터에 새겨진 여러 두려운 차원이 내가 듣고 있는 노래와 이어졌다. AI 가수가 부르는 단 한곡의 노래가 네 시간 동안 반복되는 공간을 희열이라 부른다. 어쩐지 나의 뇌를 뚫는 도파민의 순간들이 '금기'인지도 모르겠다. 잘 안 들리는 가사를 검색해도 온라인은 허락하지 않는다. AI 예술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시위인 건가. 이미 바닥까지 젖어버린 침투의 흔적이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금기'의 지배는 인간의 욕망과 계급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본성도 관계도 예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