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색 첨탑 옆

느린 시간

by서희복

교회가 뾰족하게 솟아 있다 위 쪽에서 탑이 좁아지는 각도에 맞추어 창문이 길다 그 아래로 청록색 네모난 담이 둘러져 있다. 유럽의 성처럼


바라보는 아래쪽에 도로가 있겠지 아마도 이면 도로, 청록색 첨탑을 지나면 바로 대각선에 편의점이 보이고 우회전을 해야 하는 자동화된 습관이 희미해져야 한다는 반복된 혼잣말


기억이 살아나면 다른 이름의 편의점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근처 카페를 아쉬워한다 진한 카페라테와 까눌레, 주차는 앞이 아니고 옆이어야 과태료를 피해 간다는 젊은 여주인의 미소


그곳의 첨탑은 전체가 청록색이고 길고 더 뾰족하다. 급경사의 넓은 끝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면 곡선으로 멋을 낸 파란 글씨의 간판이 걸린 작은 잡화점과 만났다가 바로 되돌아가는 곳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돌아와 가능한 한 멀어지는 게임은 스릴러 장르로 치면 놀란이나 스필버그의 뻔한 메시지 같은 순둥이 이념 판타지 정도


흰색으로 칠해진 높은 천장에는 눈이 덜 부시게 불투명 커버를 씌운 기다란 등이 듬성하다 누구나 행복한 길에서 탈선을 하기도 하고


떨어진 길에서 먼지를 털며 디폴트가 되고 다시 링거액이 들어가는 관을 느끼며 시원하다 희석되는 농도만큼 내려갈 밀도와 압력을 계산해 보기도 좋고


아픈 건 만져지는 곳 말고도 더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만 오물거리며 웃는다 이 와중에 얼굴 근육이 귀에 걸리면 오해가 되고 이내 혀 차는 소리


미칬는갑다


그 옆 붉은 벽돌집 사 층에 사람이 산다고 누워 있다고 창 마다 긴 알루미늄 창살이 서너 살 아이 주먹만 한 간격으로 위협한다 사람을 다 막아 내는 좁은 틈으로 분주한 기웃거림과 북적임

우연이 쥐어 주는 순간마다 경이로 받아들일 수 없다. 사람이 없는 곳에 오래 머물러도 그건 혼자가 아니다. 생의 밑바닥을 들어내면 달랑 2미터 남짓한 안식처, 그마저도 혼자 들어갈 수는 없다. 구차한 무게로 끝까지 지게 되는 세상의 신세

하얀 천장과 누운 매트 사이에서 더 강해져야 할 바카라임감도 의무도 없다. 거대한 집착에 광속으로 달려 향한 곳에는 찰나의 회한으로 회귀하는 느린 속도뿐 매듭의 방법은 기억에 남은 세 가지 이외에도 더 있을 것만 같은 주춤거림만


까뮈를 더 읽다가는 정신을 차려야 할 순서를 잃을 것 같아서 단 한 줄의 정확한 문장만 찾고 그만둬야지 단단히 각오한다

절망과 사랑에 순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사랑과 희열 뒤에 남을 절망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어느 때 만나게 될 절망을 직감하는 것보다 문득 이미 깊은 절망 속에서 위를 바라보는 인간을 청하는 것이 나은 건가 자신에게 절실히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는 건 삶에 대한 사랑 없이는 완전한 절망은 없으며 철저한 침잠없이 삶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라 이해한다.


어디만큼 가라앉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건지 사랑과 절망 사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식이 수많은 예술가 작가 철학자들의 놀이터인 것만 같아서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는 삶, 그 기만술에 놀아나고 있는 것인지도


떠오르는 것들에 잔 그리움만 달아 둔다 사랑에 닿지 않고 절망하는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


가장 정확한 표현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그런 까뮈의 고뇌를 이해해 보고자 어수선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그의 산만하기 짝이 없는 소설과 에세이들에 굴러다니는 충혈된 눈알 dog-tired



*: p.260, 삶에 대한 사랑, 《안과 겉》, 알베르 까뮈 디 에센셜, 민음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