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방인, 프랑소와 오종 감독, 2026
mer바다와 soleil태양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Mersault뫼르소*, 갈증도 없고 온도도 없다. 바다가 모두 가져가버린 짠 기운을 되돌리지 못한다. 적셨다가 밀려가버리는 진한 수분들이 돌고 다시 휘돌아 겉돌고 만다. 하얗게 끌어 오르는 파도만큼이라도 조금만 더 깊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 어정쩡한 플랑크톤처럼 표면에 닿는 자극만큼만 거리를 좁혔다가 멀어진다. 바라보는 곳은 초점 없이 거리를 재고 올라타는 힘만큼 다시 내려오는 거라 반응한다. 이쯤에 시선이 떨어지고 저 멀리 고개가 돌아가고 꽃무늬 원피스에 허벅지 사이 욕정이 간지럽다.
경계의 비겁함이 습관이 되고 삶이 된다. 고통이 가득 차오를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감의 축복, 단 한순간의 칼날로 깨우치는 끝, 아니 새로운 죽음의 시작을 향한 희열이다.
다시 살아
다정하게
덤덤한 자극을 따라 우연으로 점철된 시간의 연속, 파고드는 빛을 견딜 수 없는 예리한 단도 날의 반사는 이미 죽이고 죽는다. 뇌를 그리고 내장을 후벼낸다. 방어와 발사 사이의 짧은 간격이 유죄, 그 사이로 축축한 바다의 흔적과 끈적한 태양이 버리고 가버린 현기증이 남는다. 습한 점도 사이에는 점점 더 굳어가는 흘리지 않는 눈물이 있고 열지 못한 관 안에 누운 보지 않은 주름이 있고 표현하지 못한 슬픈 덤덤함이 있다.
어머니 장례 가는 길에서 흘린 땀, 서둘러 비벼 끈 담배, 냉면 사발 카페 라테, 구겨지는 늙은 몸에 무심한 시선, 견디기 힘든 것들에 대한 회피, 처벅처벅 걸었던 해변의 얇은 물가, 바다 위 그녀의 배를 베고 누웠던 부표의 흔들림, 스치며 곤두서던 흥분, 키스와 섹스, 유죄의 증거들이 생명의 스러짐과는 무관하게 달려드는 시간들이다.
삶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체념과 절망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이다. 딱 필요한 언어만큼의 무게가 솔직한 냉담함의 변명이 되고 그 성애 낀 자리를 사랑하고야 마는 애처로움이 깊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갔다가 그 때문에 다시 멀어지는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우연한 자극에 요동치며 전부를 거는 무모함이 고통을 부르지만 바로 그로 인한 절망이 본질적인 빛을 보게 한다.
감옥
유혹하는 사제
마리의 순수한 몸과 눈빛
보이지 않는 존재의 승인으로 레비나스적 의미를 부여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인 오종의 이념을 시대의 시선과 병렬 구조로 억지로 꿰려는 것 같다. 원작을 물에 풀어버린 것 같은 불편한 억지가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소수에 대한 존재의 승인, 보이는 무의미 속에는 보이지 않는 타자가 이미 존재하며 끊임없이 요구한다. 부조리의 끝에 윤리적 강요를 이으려는 오종 감독의 몸부림으로 읽는다.
다정한 무관심은 아무런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뫼르소니까.
원작에서보다 사람과 세상과의 거리, 무관심과 서운함이 마주 보는 슬픔이 영화에 더 짙게 배어 있다. 그런 아름답고도 모호한 경계 속에 시종일관 머무르며 영혼이 바래질 만큼 텅 비어버린다. 그런 중독성 희열이 병이 되는 것 같다. 미치도록 좋다.
무엇도 차지 않은 어떤 공간에 대해 '없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無의 뒤에 항상 빛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의 무관심 무가치 무의미처럼. 없어서 좋거니 있어서 나쁘거나. 그래서 우연이 전부 인지도 모른다.
내가 앉았던 B3 좌석이 비어 있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영화다. 갈망하는 곳에 무無를 붙이고 아닌 척한다.
*: 행복한 죽음 (La Mort heureuse), p. 197, 알베르 까뮈 저, 김화영 역, 2025 (1995년본 개정판), 바카라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