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특별전] 벨라 타르 x 라즐로 크리스너호르커이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시간 26분, 2000)로 공포에 물들어 스스로 몰락하는 세상에서 나를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이 거센 바람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명의 색을 마주한다. 짙은 잿빛 눈동자와 그 안에 담긴 두려움을. 저항이 초래하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의 해체, 명확하지 않음이 지배하는 세상은 폐허 속에서만 온전하다. 보이지 않게 스며든 공포가 심장을 갈라 그 틈에 잿빛 숨을 불어넣어 스스로 행군하게 만든다. 사실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통제의 공포가 심어진 희미한 메아리에 목소리를 묻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다리는 폭력을 향해 걷고 눈을 모으고 팔을 휘두른다. 쪼그라들고 늘어진 피부가 성기를 따라 흘러내릴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래, 그런 모두의 종말, 목구멍을 통해 꾸역꾸역 나오는 신음, 어떤 고통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예술만이 피난처가 될지도 모른다. 저항하는 자는 천천히 끼익거리며 흔들린다.
파멸(2시간 1분, 1988), 그 욕망이 향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여자의 벌어진 입술, 흔들리는 허벅지, 남자의 초라한 집착, 노래 가사 사이에 끼어든 파괴의 유혹, 아이의 순수, 쾌락을 위한 억지, 닳아 없어져 버린 것들에 대한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기엔 한쪽에 치우친 세계관이 너무 처참하다. 천박함의 본질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관계를 포기한 그의 것이어야 한다. 결국 그의 무바카라임한 비난이 다른 쪽으로 향하면, 커다란 그녀의 공허 안에 다른 사람을 허락해야만 한다. 허락이 아니라 자해일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이름은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풍우를 함께 뚫고 나가는 동행이다. 관음의 본성은 중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겉돌다 끝나는 삶, 누가 더 곤두박질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버려지거나, 더 버려지거나, 더 심하게 버려질 것이다.
사탄탱고(7시간 19분, 1994) 내내 주먹을 쥐고 입을 막고 있었다. 내 영혼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천박하고 맹목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이미 도덕률은 사라지고 없다. 해체된 질서는 개인의 욕망으로 남아, 평범하게 창녀가 되고 멀쩡한 하루를 알코올에 절이며 여자를 탐하는 남자는 여자의 남자를 협박하고, 여자의 남자는 돈을 탐한다. 죽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말에 구원을 꿈꾸는 사람들, 아이가 학대당하고, 아이가 살생하며, 아이가 자살하고, 아이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편에 서서 사람들을 이끈다. 개인적 음모의 실현을 위해 체제를 이용하고, 이용당한 언어는 스스로 권력 안에서 윤색되고 순화되며 고정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정당화하는 언어를 통제하는 사람들도 결국 사적인 욕망의 일부일 뿐이다. 마음을 읽는 자는 사람의 숨통을 쥐고 돈을 쥔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다른 방향으로 또다시 종말을 향해 걷는다. 세찬 바람 속에서 그 길이 지옥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사람으로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토리노의 말(2시간 35분, 2011)이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보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니체가 끌어안고 통곡하던 그 말이 오랫동안 스스로를 닫는 모습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고스란한 체념이자 최후를 준비하게 하는 의식이다. 하나씩 스러져 가는 삶의 징후들이 언어의 절제나 소멸로 이어진다. 끌어올려야 할 사람이라는 덩어리가 마치 벌레가 굴리는 먹이감처럼 수동적이다. 가까스로 핏기 없는 손가락을 타고 가느다란 두 개의 실이 이어진다. 그 매듭마다 삼킬 듯한 찬바람이 스며들고, 피난처의 경계 안에서 잦아든 소리에 두려움을 묻는다. 지껄이는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른 우물의 남은 흔적에 경악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을 안다. 말이 거부하는 몸짓을 이해하면 종말의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말을 끌어내고 술을 챙기고 부츠를 챙기고 마지막 남은 감자 보따리를 수레에 싣는다. 말(horse)은 안다. 끝내야 할 곳이 그가 있던 곳이라는 것을. 인간이 둘러주었던 굴레가 그제야 자신의 몸으로부터 떨려 나가고, 모든 마구로부터 자유를 느끼는 그때가 지금을 잃어버리는 순간이라는 것을 이미 말은 알고 있다. 불이 없는 곳에 생명은 없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2시간 19분, 2007)가 남긴 것은 어깨를 휘청이게 할 거대한 무게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매복한 자의 눈이 세상을 베어 먹는다. 자신만의 규율로 행동을 판단하며, 앞에 선 사람들은 단순한 가재도구이길 바라지만, 맞받아치는 고함은 정렬된 뇌를 끊어 놓는다. 목격하고 훔치고 말리고, 손을 떨며 계획하는 미래는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신음을 외면하려는 처절한 사투가 있을 뿐이다. 눈동자에 가득한 두려움, 만용, 비겁함이 세상에 비춰지며, 다시 종말의 타임라인을 머릿속에 그린다. 우연을 가장한 빵과 술과 속삭임, 그리고 무고한 죽음 또는 철저한 각본에 따른 살해가 손바닥에 쥐어 주는 것은 방황하던 자의 목숨 값이다. 여자는 듣고 눈물을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을 목격하는 순간을 위해 급히 걸을 수밖에 없는 그 사나이의 여자는, 허락도 거절도 아닌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다. 생명의 몇 푼이 긍정일까, 부정일까. 인간 본성에 대한 당황스러운 논리가 런던에서 시작되고, 다시 여자는 런던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대비 소리, 비슷한 멜로디의 우수에 차 나른하게 조여오는 아코디언을 주무르는 남자의 손, 그리고 여자의 몸짓이 다섯 편의 영화를 보는 삼일 내내 머릿속에 가득 차서 현기증이 났다. 그런 역류, 아마도 종말의 증상들이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지럼증으로부터.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와 다른 각도에서 다시 시작하는, 끝을 향한 시선이 슬프다. 이는 체념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다. 어디로 가든 결국 지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고 긴 롱테이크 장면들에 흠뻑 빠졌다. 바람이 시작되고 끝나는 순간,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장면은 마치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꿈속에서 경험하는 가위눌림 같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앞모습을 천천히 지나, 옆 얼굴의 불규칙한 그늘을 따라 뒤통수를 거쳐 넓은 등으로 가려진 렌즈에 어둠이 차오르며 장면이 전환되는 것은 암울한 세상의 본성,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어둠이다. 그 어둠의 중심에 부정한 여성의 이미지, 남성의 비루한 수동성, 끝으로 치닫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어 해체된 고래, 길을 잃고 헤매는 개들, 끝을 예견한 말, 거슬리게 웅웅거리는 파리, 규칙적인 똑딱소리, 거센 돌풍의 저항, 끊임없는 빗소리, 생명의 잔상들, 철저한 파탄 후에 드디어 드러나는 진실이 된다.
찰나의 본성이 남은 삶을 지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