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메이커

[시작] 좋은 날의 향기

by서희복

구름 위에서 내려오는 중이다. 천. 천. 히.


방금 건너온 한 컷의 태평양이 소심히 살던 나를 열어젖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사랑하고 질투하고 욕망하고 까탈스럽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너를 위해 몇 시간 먼 길을 달려 씨앗 호떡을 산다. 나를 위해 네가 그걸 먹는 시간을 바라본다. 왼 손 검지로 네 왼쪽 입가에 흘러내린 캐러멜색 찐득함을 닦아 낸다. 나도 모르게 내 입으로 들어와 버린 내 손가락에 마주 보며 머쓱하게 웃는다. 그런 진한 브라운의 연대를 기억하고 시작하고 담아 둔다.


어느 때 같이 점심 먹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다. 일하는 동안 마음이 쓰였지만 그 또한 갈림길에서 지나친 것이리라. 잘 살아라.



두건을 쓰고 데님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니트릴 장갑을 끼고 고무망치를 들고 시폰 천을 챙긴다. 녹슨 사다리 꼭대기에서 다른 세상을 본다. 나는 다시 여기까지 올라온 거다. 나무에 발을 걸치고 시폰천을 감는다. 생명에 못을 박는 건 안될 일, 둥글게 감고 가지에 걸며 잠시 나무에게 양해를 구한다. 포물선의 각도를 재고 아래위 흐들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공간에 함께 하는 자연과 같이 간다.


공연 무대를 옮긴다. 여섯 개의 나무 블록이 삐걱거린다. 이런 소리 위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마이크를 들고 라이언 고슬링의 슈트 안에 든 영혼을 위해 노래하는 그녀를 상상한다. 마음에 그리는 상상은 그림이 되고 동화가 되고 그 둘은 평생 쏘울메이트가 된다. 그런 갈망을 품고 노동의 발을 촘촘히 한다. 땀, 이런 신성함이란.


작업하며 만난 사람이 작고 신기한 생명체라며 나를 본다. 못하는 게 뭐냐. 질문이 아니라 입에 침 바른 말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곰곰 대답을 시작하면 끝나지 않을 그 이상한 사탕발림, 그래 나는 못하는 거 없다. 살아있으니 하는 거다. 타일을 붙이고 줄눈을 채우고 페인트칠을 하고 경첩을 단다. 전선을 정리하고 천장 전등갓을 달고 필름을 자른다. 살고 또 산다. 나를 세상에 바친다.


온전한 혼자라서 가능한 일, 무엇이든 하는 것, 어떤 생각이든 하는 것, 아무렇게나 걸어보는 것, 흠뻑 가슴을 내어주는 것, 가득 눈물을 쏟아 보는 것, 독하게 삼키는 술에 묻혀보는 것, 좋은 사람에게 달려가 으스러지게 허그하는 것, 나를 온통 내놓아야 사는 맛이 나는 것, 한눈에 믿고 내동댕이쳐지며 헛웃음 웃는 것, 알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오래 앓는 것, 그러다 영화 보며 영화가 되고 노래가 되고, 솔로 다독임에 익숙해지는 것, 그런 불치병.


이층 난간에 시폰천을 걸다 가시에 박혀 벌컥 깬 몽상에 가시가 꿈인지 멍하게 건드려본다. 악! 이런 노동 이런 땀 그를 위해 하는 것들 그녀를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내가 된다. 세상이 달려들어 내가 되면 세포 사이가 헐렁해진다. 가벼워진다. 행복해진다.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잔에 애플사이다를 반쯤 넣고 홍초를 입힌다. 세상이 그렇다. 투명하다고 모두 크리스털이 아니고 색깔이 보이지 않는다고 맛이 밋밋하지 않다. 빨간 포인트를 떨어뜨려 주황의 칵테일이 완성되면 걸어둔 모든 잔에는 각각 다른 색과 부피의 내가 담긴다. 사는 게 그렇다. 각각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새콤하고 다르게 황홀하다. 나는 대체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