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그땐 이미 늦을 거예요.

가장 그런 때

by서희복

피클 국물을 한 모금 마셨어요. 다른 때와는 너무 다른 업이 느껴져요. 옆 투명한 병에는 34.2%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그렇게 독하지 않아요. 시큼하게 절은 혀를 목구멍 안쪽으로 잡아당기다 보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혼자 감동하는 시간이죠.


너무 애달파하며 살지 말아요. 그게 사실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살아질 시간이거든요. 죽기 전에 인정받으려고, 정상에 우뚝 서고 싶어서, 그냥 누구에겐가 미안해서, 그건 자기를 사는 게 아니잖아요. 타인을 입지 않아도 돼요.


타자성 otherness에 자기 정체성이 있다고요? 노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타자는 거기 얼마큼의 거리만큼 존재하는 거죠. 때로 상대를 반영하고 인정하고 살게 될 시간을 결정한다고들 하지만 본연의 자기됨 selfness이 없는 타자성은 공허일 뿐이라고요.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숫자가 있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해요. 거기에 집착한 자기됨 selfness은 이미 타자의 시선 안으로 녹아 버리죠. 맹목의 숫자 늘이기 놀이는 너무 슬픈 일이에요. 거기서 빠져나와 진정한 순간들, 진지한 시간들, 진하게 채색된 공간을 누리고 싶진 않나요.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요. 버스 정류장에서 앞다투어 뛰는 사람들, 더 멋지게 보이려고 글자에 단어에 문장을 꿰어 맞추는 강박을 가진 기술자들을 구경해요. 숫자를 높이려 기술을 걸죠. 클릭, 클릭, 내가 널 읽고 있다는 허망한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거예요.


타자는 모두 자기 존재를 위한 수단이고 자신은 타자의 추구할 대상이 되는 거라는 착각은 불행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예요. 진심으로 말 걸어 본 적이 있는지, 가슴 깊이 심연을 드러내본 적이 있는지, 사소한 순간들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어떤 삶인지 궁금해요.


스스로 꾸려야 할 시간들을 바라보고 싶어요. 그렇게 압축된 시간들을 응시하는 시간을 길게 가지고 싶어요. 타자성이 우선이 아니라 자기성의 충만이 먼저인 삶, 그런 농도를 가지고 싶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눈 맞추고 그들 안의 타자를 한껏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거겠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억압 없이 자유로운 그런 순간을 향해 걸어가는 거예요.


부정의 대상이 되는 건, 경쟁의 목적이 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죠. 깨뜨릴 수 없는 벽, 그 투명한 견고함을 해체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요.


너무 빠른 시간들, 너무 높은 기대들, 가혹하게 재촉하는 평균이라는 폭력, 이성을 잃은 자기성 selfness, 하지만 그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해요. 왜냐면 우린 우리 삶을 제대로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