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도 끝도 없는 밑과 끝

[영화] 아비정전, 왕가위 감독, 1990, 2026 4K 리마스터링

by서희복

Days of Being Wild, 영어 제목이 눈으로 스며들자 어떤 한 때로 시간이 수축한다. 아름다운 숲과 나무들 사이를 유영하던 축축한 날개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는 그 순간 새는 산화한다.

전기적 이야기라 하기에는 거친 언어와 몸짓의 시작이 어디인지 모른다. 근본이 없고 애정도 없고 마주하려는 의지도 없다. 서로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회한을 안고 젊은 날이 태워져 재가 되는 시간을 기어이 감내한다.


발붙일 곳 없는 불안을 들고 휘두르는 건 무작위로 손에 들리는 총, 칼, 각목과 속이 빈 가슴과 떠밀어내는 사람의 온기다. 한 때 그랬다로 끝내기에는 길고 긴 고뇌, 길고 또 길어지고, 다시 길어지는. 가시 철망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가오는 그를 그녀를 안는다. 상처만 덜렁 가라앉은 침대, 누워있는 영혼은 살아 있지 않다.


텅 빈 눈 차가운 눈물 건조한 심장 흐르는 슬픔 외면의 감내 무심한 미소 체념의 시간 견뎌야 하는 무거운 공기 황폐한 관계 헤어 나올 수 없는 거친 중독 애착 결핍의 증상들, 자신에 가장 미쳐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방황, 어디가 시작인지 끝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런 때가 있었던가.


데칼코마니로 중첩되는 초록의 숲이 지나갈 때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가진 자만이 꾸게 되는 비탄의 낙원, 죽음 그 자체인 그 공기를 뚫고 이미 죽은 새가 날아간다.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며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그 숲에 눈물을 묻고 숨을 묻고 아직 식지 않은 동맥을 묻는다, 깊이 그리고 가득.


그런 오랜 때가 있지 않았다. 항상 폭발하듯 죽었다가 살아 살았다가 죽어 비명을 목구멍에 삼키곤 한다. 감당할 만큼만 보여주고 나머지를 불 지르며 화상을 입는다. 곁에서 한 발 풀쩍 뛰어 멀어졌다가 빙빙 돌다가 조금 더 여유를 두는 지혜를 배운다. 엉키는 순간 관계는 끈적이는 상처가 되는 거다.


반항은 한 때라고 그때를 이렇게 그렸노라고 영화는 중얼댄다. 거짓말. 한 때라니 그 시작은 어디였나 지금은 어디에 서있나 끝이 있었던가. 혼란과 혼돈을 이겨내지 못해 들끓는 이 하루들을 무엇이라 단언하지 못하는 지금, 다시 시작인 건지 알 수 없다.


구부정한 곳에서 하나씩 하나씩 공들여 바지 안주머니 뒷주머니에 재킷 바깥 주머니에 윗 주머니에 촵촵 옷을 반듯이 펴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올리고 뒤통수를 다독여 정리하고 하얀 손수건을 다정하게 접어 포켓스퀘어로 넣은 허세를 삐끔 내밀고 지갑을 넣고 돈을 세고 세심하게 단장하고 텅 빈 마음을 모두 가린 다음 거울을 본다. 그 양조위가 현재를 살고 있다.


장국영의 눈빛이 생명을 내려놓은 듯한 순간들에 소스라친다. 그게 거친 방황과 반항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