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해

[선물] 친구와 꽃과 노래

by서희복

전생에 나는 그들의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을 이렇게 산다.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 나도 그렇다. 세상이 나를 믿고 나는 세상을 믿고 사람을 믿는다. 살면서 두려워지는 건 사람이긴 하다. 세상은 자신 있는데 사실 사람은 자신 없다. 나의 그들은 자신 있는데 그들 밖의 관계는 두렵다. 하지만 수적으로 좁은 관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넓은 세상을 산다.




오픈한 카페에 앉았다. 익숙해진 키오스크, 오픈 기념 1,900원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행복하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플래시댄스(1983)의 ost가 흐르는 새로운 시작, 지금 이 순간의 주제다.


What a feeling! (멋진 기분이에요!)


어제 만난 친구의 꼬리를 늦은 아침까지 붙잡는다. 친구의 언니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나보다 이년이나 늦게 태어났지만 내게는 큰언니 중 큰언니다. 이년이 감사하고 내 친구 사이 삼 년이 벅차고 기쁘다. 그 어느 순간쯤 나는 풋풋한 프러포즈를 받았다. 허락하지 않았던 친구의 동생, 그 네 살 차이를 지금까지 품고 산다. 이 년 삼 년 사 년이 내게 남은 남을 친구들이다. 나는 다 가졌다.


언니로부터 온 선물은 내 방 원목 서랍장 위에 나와 26년째 동거하고 있다. 동쪽 새벽을 밝히는 그믐달 끝을 조금 더 힘주어 늘여 풀쩍 건너갈 수도 있을 도자기 꽃병, 종이로 빚은 꽃이 숨 쉬며 가득하다. 여러 번 이사 때마다 품에 안고 다닌다. 꽃의 관절들이 퇴행하여 목을 떨어뜨릴 때마다 눈물로 붙여 다시 올려두곤 했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보고 싶은 언니, 가끔 모두 같이 만나 와인잔을 부딪힌다. 친구의 아버님 어머님께서 내 월세 보증금보다 더 비싼 공예장을 들여주셨을 때 조각가의 예민한 손길이 간 움푹한 원목장의 고랑마다 오래 천천히 머물며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네. 둘이 마주 보며 그런다. 우리는 원 없이 살았네.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하며 말한다. 그녀가 산 온기들이 내게 오고 내가 모자라게 산 마음과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사랑할 시간도 반성할 시간도 조금씩 줄어드는 게 삶이다. 지금이 가장 젊은 순간이니 가장 크게 살아야지.


서로의 개인 정보를 알리지 않고 전하려고 내 장편 소설을 하루 오전 오후 비행기 왕복으로 어느 지하철역 보관함에 두고 왔다 하니, 친구는 '너답다' 그런다. 그 장편 이야기를 가져간 사람이 한 단어로 표현한 말은 '신박'이라고 했더니 친구도 끄덕끄덕한다. 첫 소설은 자기 이야기라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읽으면서 어느 소설가 생각이 났다고. 오픈 결말이 좋다고. 친구 숨소리로 전해진 내 이야기에 나를 묻는다. 세상 전부를 묻는다.

나는 그래서 지금 조금 더 용기내기로 한다. 충만도 부족도 허락도 거절도 세 번쯤은 도전해 보는 나를 완성하는 거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