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허기

[영화] 위커 맨-파이널 컷, 로빈 하디 감독, 1973, 2026

by서희복

The Wicker Man: Final Cut, 2026 감독 복원판



문화인류학 바카라장을 넘기고 있는 것 같았다. 높은 나무 위에 올려 아래로부터의 흔들림으로 떨어진 생명의 육질을 즐겼던 식인 풍습에 여전히 높은 나무를 올려다보면 누군가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다른 이의 먹이가 되기 위한 죽음의 공포는 문화적으로 옳은 건가 인류학적으로 숭고히 여겨지는가. 침 튀는 토론 후 심한 피로마저 두려웠던 오랜 고대 부족의 풍습들, 종교적 희생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인간은 매번 의식의 정당성을 뜨거운 심장 속의 피로부터 걸러낸다. 누가!


호러라는 장르만 알고 들어가 끌고 나온 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헐렁헐렁하게 빈 위커 맨이었다. 생명을 가득 채워야 기어이 활활 살아나는 가치, 인간의 가슴 마냥 여러 개의 방을 가진, 그 방들을 열기로 채워야 삶이 가장 풍성하게 닫히는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갈증이다.


이상한 비탄의 순간들, 오만한 권력, 그로부터 나온 외침 속의 신의 존재와 영원한 삶, 환생의 꿈은 그야말로 자유를 박탈당한 영혼이다. 종교의 순수는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하는 건 아닌가. 어디서부터 순수를 해치는지 분류가 가능한가. 자유의지는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인가. 맹목이란 건 억압에 대한 유혹이지 않은가.

고대 인류의 풍습은 영화를 통해서는 보이는 문양을 택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탐욕으로 깊숙하다. 자신의 헐렁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 욕망의 사냥에 치열한 군상들은 원시적인 광기를 가진다. 영화에서는 굳건한 일체감으로 기이하게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매끈하게 위장한 호의로 가장해 자신의 게임 속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공동체의 고대 애니미즘적 목적을 위해 게임에 치밀한, 50년도 더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보다, 오직 개인의 영화를 위해 타인의 영혼을 해체하여 삶의 수단으로 쓰려는 지금 시대의 게임은 더 저열하다. 영화 속의 기묘한 광적인 조화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어울리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지금의 고독한 개인보더 더 나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힘의 집중이 필요한 고립된 세계에 대한 우화와 힘의 분배가 필요한 지금에 대한 갈증이 서로 다른 온도로 가슴에 흐른다.


사람의 실체적 내재적 밀도에 대한 이야기, 제어가 가능한 숫자, 통제가 가능한 슬롯, 맹목의 믿음, 희생양이 필요한 그때에 대한 변명과 지금에 대한 예언이다.

권력의 방향이 바뀌어도 외로운 개인은 더 고독에 갇히는 것 같다. 모래알이 돌풍에 흩어져 날리는 푸른 해변에 거대한 위커 맨이 서 있다. 희생양을 찾지 않고 스스로의 가슴을 채워 서로를 듣고 양보하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빨간 목도리를 버린 지 오랜데 요즘은 파란 스카프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