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거울 그리고 우연

[영화]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2005, 2026

by서희복

상상할 수 있는 극한까지 금기를 뒤집어 놓으려는 건 그게 사실 금기가 아니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영화적 누설이다.


게임의 요소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기억과 연합되어 또렷이 각인된다. 영화 내 다큐멘터리적 혼란에 휩싸여 머물렀던 시간과 공각적 경험에 주목한다. 데모와 화염병과 경찰의 곤봉 아래서 영화적 진보가 권력에 밟히는 사건은 훗날 감독이 만들 영화의 연출을 의도적 극단으로 끌고 갈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칭 씨네필이라고 하는 청춘들이 실제 현실에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 영화 장면들을 게임으로 환원하고 그들 내면의 욕망을 실험하는 것에 집중한다. 두려움을 게임 속에 감추고 마치 당당하다는 듯, 엉키는 세포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게임용 영화 장면들은 청춘들의 숨겨둔 욕망을 표출하게 하는 열쇠다. 무작위로 생각나는 영화 장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위적으로 숨겨두었던 미숙한 욕망 위에서 서슴없이 그래도 좋은 것처럼 서로를 충동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과 상통한다. 몽상가들,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


희박한 가능성을 격리된 공간에서 추구하는 것이 청춘이라는 삶의 한 구획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청춘에게는 드문 것이 아니라 전부가 되는 것이다. 찬란하다 할 것인가 비겁하다 할 것인가. 고전 영화의 장면들이 실천적 현실을 외면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은 가장 불안을 덜 주고 잘 아는 것으로의 도피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 집착할수록 현실과 멀어진다. 집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다.


태초의 순수를 모방하며 신화적인 갈증을 더한다. 남녀 일란성쌍둥이라는 판타지로 어떠한 연결도 가능하다는 두려움을 열어두고 마주 보며 실험한다. 이마도 눈도 어깨도 손도 가슴도 배도 성기도 허벅지도 발가락도. 원래 한 몸이었으므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하지만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 공포는 눈빛에 가득하다.


억압의 폭발을 예견했다는 듯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피로 물든 손이 환호하고 눈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받는다. 가장 참기 어렵고 견딜 수 없는 위선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이 모든 그의 로망일까.


몽상일 수밖에 없는 헝클어진 시간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변명한다. 현실 회피와 그 방패가 된 육체, 첫 경험, 피와 위선의 희열, 몽상으로 끝날 가벼운 감정들, 그녀의 눈물은 그의 절망이다.


반전의 목소리도 정의에 동참하라는 외침도 가장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순간에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할지 아는 것과 옳은 물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다르다.


운명은 없고 우연만 있다. 어정쩡한 불꽃 속으로 두 몸인 한 영혼이 스며 사라지고 부적절한 장소에서 낮은 목소리로 우물대는 정의가 되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