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줄, 팽팽하게

[통증 단상] 예술 수다라는 진통제

by서희복

너무 멀리 와버렸다. 눕고 싶은 자리는 수십 킬로 밖에 있다. 꼭대기부터 기어 내려오는 오한이 세포를 조인다. 윗니 아랫니를 꾹 맞추며 그 사이로부터 힘을 모은다. 양 볼 근육이 단단해지고 귀 밑이 붉어진다. 기를 모아 머리 가운데쯤으로 가둬두고 두통을 벌려 잘게 다진다. 다진 통증을 하나하나 꿴다. 팽팽한 줄, 끊어지면 무너지는 정신줄. 지금부터 네 시간 반 이 줄을 꼭 잡고 심장이 펄떡이는 간격마다 주먹을 쥔다. 주문을 건다. 임무를 제대로 마치면 시간이 흐르는 거다.


제어할 수 없는 압력, 어쩔 수 없는 무게, 하얗게 퍼지는 시야에서 춤을 춘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꾸역꾸역 검지 손가락을 구겨 넣으며 신발을 신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지금은 춤을 출 시간. 줄타기를 할 시간, 뜨거워진 자판으로 할 일을 새기는 시간이다. 끓어 넘치는 열기에 손 끝이 타오른다. 불꽃을 쥔 손바닥에는 붉은 지도가 한가득이다. 그 지도를 풀어 그곳에 가야지.


수리수리 마수리 아브라카다브라 주문이 뜨겁다. 하얀 자판이 반사하는 글자들을 걸어두고 하나씩 확인하며 길을 건넌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땐 꼭 레일을 잡고 계단의 높이에 맞춰 발을 구부린다. 신발 앞꼭지가 계단 턱에 닿으면 몸을 뒤로 당겨 뒤꿈치로 무게를 옮긴다. 그렇게 열다섯 개쯤의 계단을 내려가 현관 유리문에 몸을 기대고 어깨부터 앞으로 밀어 외부로 빠져나간다.


달구어진 도로를 지나 빨간 신호등을 건너면 오늘 당도해야 할 약속이 있다. 오늘 풀어야 할 목소리가 있다. 손수건을 적셔 얼굴의 붉은 기를 달래고 냉차를 마셔야지. 열기로 오그라든 얼굴 근육을 풀고 벌어지지 않는 입술에 있는 힘을 쏟아야지. 돌봄에 관한 가족 이야기인데 나를 돌보지 못한 무바카라임에 두려운 시간이다. 의자에 붙인 엉덩이 각도에 신경 쓰면서 옆으로 넘어가지 않는지 팔에 힘을 주어야지. 활활 타오르며 쥐는 포크가 녹지 않아야 할 텐데. 샐러드를 먹고 치즈를 녹이고 와인을 마시겠지. 오늘은 가장 떫고 묵직한 풍미이기를.


인상 깊은 장면을 얘기하고 그림으로 그릴 땐 허전한 노부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체온을 식혀야지. 닳고 닳은 몸과 마음이 덧없어지며 사라지니 오늘 내 뜨거운 몸뚱이도 차가운 눈물을 흘리리라.


없는 살림에 가진 것이 없어도 곁을 내주는 것이 가장 큰 돌봄이지. 있는 사람은 켜켜이 있고 싶어 안달을 하고 가장 가까이 품어야 할 사람은 유배지로 보내고. 마음 없이 돈으로 바른 관광지에서 잠옷 바람에 물가에 나온 노부부의 뚫린 가슴, 그들의 눈물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내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의 구부정한 등을 다독이며 나는 어느새 무통 마법에 빠진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집에 가야지.


1953년 동경의 노부부가 2026년에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