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재로 가득한 세상

[영화]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감독, 2009

by서희복

Antichrist, 2026 재개봉


어떤 믿음으로 들어가는 순간 자유는 포기하는 거다. 신의 이름으로 단단한 세상에서 혼돈을 받아들인다. 반대자가 된다. 그 경계 안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경계 밖의 생명을 위협한다.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음을 비겁하게 감추고 믿음이라는 장막 뒤에 몸을 붙인다. 삶이 시작된 곳에 죽음이 준비되고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핀다.


선악은 선/악이 아니라 ○일 것이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검게 그려진 선으로 둘러싸인 백색의 청산가리, 금속성의 비소, 그 사이를 채우는 순수와 악의와 친절과 미세한 온기, 광기와 위선, 미소와 부드러움 따위가 뒤죽박죽인 혼돈, 억압을 벗어나려는 몸짓, 생명의 잉태, 살의, 살해로 가득한 곳.


믿음에 배신당하고 절망 속에 피신한다. 말 못하는 어린 뼈에 증오를 가한다. 함박눈 속에 추락하는 순수는 비탄의 이유가 되어 악의 씨로 타오른다. 섣불리 구하려는 자 극한의 고통에 갇히고 태워버린 삶으로부터의 자유는 잠시 뿐일 것이다.


평온한 표정으로 따먹는 에덴의 열매가 다시 짓뭉개져 피로 흐를 것이다. 숲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숲은 모든 선의 시작이다. 자연이 품은 바람과 비와 도토리와 새와 여우가 부추기는 공포에 굴복해도 좋은 곳, 그 숲, 에덴의 동산에서 피는 끊이지 않는다.


악이 벌로 정당화되고 발화한 통증이 피를 부른다. 자신을 도려낸다고 용서될 수 없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파괴적이다. 용서하게 될까 봐 먼저 목을 조른다. 사라지면 좋을 사람들이 욕망의 불을 지피고 그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천사를 가장한 악마가 된다. 쾌락의 근원에 가위질하는 영혼에 위선이 가득하다.


정화를 위해 눈물이 허락되는 것, 그 자유를 향한 갈망에 목숨을 건다. 눈물이 흐르는 그 찰나만이라도 순수할 수 있다면. 억압을 깰 수 없어 더 절절한 마음이 숨을 막는다.


검붉게 솟구치거나 흥건하게 바닥을 적시는 피가 속죄로 인도하지 않는다.


잉태된 곳에서 검은 주검으로 화장되는 곳, 그 숲 에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오래전 보았던 파리넬리의 그 욕조 가운데 솟아 퍼지던 피가, 함박눈이 내리던 창밖으로 추락한 작은 몸으로부터 눈 위에 스며들던 어두운 피와 겹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두 장면 모두에서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흐른다.



♧ 사진 from IMDB (International Movie Data-B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