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타버리길 기다렸던

[현악 콰르텟] 정동 1928 아트센터, 2026

by서희복

넓적한 미색의 초가 불을 밝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흘러내리는 뜨거운 촛농을 기다린다


조금 일찍 도착한 발자국을 지나쳐 찍으며 비 오는 계단에 나란히 서서 흔들리는 촛불을 걱정한다


길거리 버스킹의 울퉁불퉁한 불안정에 귀를 내어주고 후두둑 비속에서 천천히 걷는다


우산을 때리는 비보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숨는 빗방물이 더 기억을 자극한다


앞을 보지 않으려 함은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골고루 품을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다

어둠이 묻어가는 돌담길을 손가락으로 스치며 더 높이 좀 낮게 때로는 부드럽게 굴곡을 느낀다


비를 맞으며 손님을 맞는 촛불이 열어둔 길을 따라 들어가니 벽에 바짝 붙은 초들이 어울거린다


치마 단이 너풀거리며 촛불을 덮치지만 타오를 치마는 멀쩡하게 제 자리로 돌아온다


보이지 않으니 뜨겁지도 않은지 느끼지 못하니 불길이 되기를 포기하는 건지 허리를 숙여 불빛과 마주한다


한쪽 눈을 감고 들여다보니 촛불은 없고 저 깊이 박아둔 작은 전구가 인공 심지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주검이다 빛나는 죽음이다


주위를 돌며 기대한 한 줄기 연기도 우수에 젖고 아무도 보지 않길 바라며 흐르는 눈물 같은 뜨거운 촛농도 빈 허공으로 오른다


그렇게 화려하게 젖은 빛으로 가득 찬 홀에는 더 높이 솟은 무대마저 인공섬 인공빛이다


좋아하는 목록의 곡들이 연주되는 동안 초의 탈을 쓴 전구들이 높이 올라 하늘을 비춘다

첫 번째 바이올린이 프레스토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동안 두 번째 바이올린이 생기를 끌어올리며 비바체를 알린다


비올라의 야릇한 중간 지대가 알레그레토를 지나 짧은 모데라토에 도착해 느린 듯 경쾌하게 바이올린을 받쳐준다


여전히 나는 촛불의 빛과 촛농을 그리다 가느다란 필라멘트로 쏘아보던 전구에 갇혀 조금씩 가라앉으며 우울한 눈빛으로 흔들리고


첼로는 아다지오에서 라르고를 지나쳐 사이를 벌리며 여유를 부르는 안단티노에 머물다가 위로받으려는 심장을 바이올린에 넘긴다


바이올린이 좋다


네 명의 뮤지션들이 한 계절씩 소개를 하고 그 계절마다 끓어올랐던 가슴속의 흔적을 돌아본다


비발디

사계

콰르텟

캔들 라이트


다음 계절이 오기 전에 나를 반겨주는 산에 오를 것이다 항상 거기 있는 그 산에


마침표를 두고 온 곳이 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