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나혜석, 창비 한국사상선 문고판, 비매품, 2026
생활이 안정되고
정신이 원만할 때
이것만으로
오히려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다시
물질계를 떠나고
정신계를 떠나
일종의 신비계로 들어가려는 것으로
형언치 못할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
ㅡ p.28
1926년 1월 동아일보에 실린 나혜석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에서 취미성趣味性을 주제로 취미趣味를 먼저 정의한 부분이다. 이는 단순 오락이나 취향이 아니다. 인간 정신을 깨워 예술적으로 지향하는 가치 추구에 관한 것이다. 이를 읽으며 같이 떠오른 것이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다.
나혜석은 이 글을 26년에 썼고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1943년에 그의 논문으로 발표된 것이다. 매슬로가 어디선가 나혜석의 취미성趣味性에 대한 글을 읽었다면 아마도 그의 단계적 핵심을 만드는데 참고했을 것이다.
나혜석은 위 동아일보 글에서 생활의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생계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과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무기력에 대해 한탄한다. 체면이 중요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보다 감추고 허세 부리는 삶에서 인간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 매슬로는 이를 1단계 생리적 욕구라 부른다.
위 취미성趣味性에서의 생활의 안정과 정신의 원만은 매슬로의 2단계 안전 욕구와 관련지을 수 있다. 신체적, 감정적, 경제적으로 위협받지 않고 신체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되어야만 다음 욕구를 위한 동기가 생기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2단계쯤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다.
자신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무엇을 원하는지 들여다볼 줄 알고 깨닫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안정과 풍요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에서 집단에 속하기를 원하는 슬롯적인 소속감과 더 확장된 관계로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 매슬로의 애정, 소속 욕구인 3단계다.
이후 슬롯적으로 인정받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4단계 존중 욕구를 충족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고자 하는 자아실현 욕구인 5단계로 이동하면서 예술적인 창의성, 정신적인 가치의 음미, 즉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종 단계에 가까워진다.
이후 매슬로가 더 발전시키는 자아초월 단계는 자신을 넘어 타인, 인간 슬롯 전반의 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욕구인데, 이것이 나혜석의 신비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 경지에서의 쾌감을 향해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기쁘게 몰입할 수 있는 그것이 진정한 취미성趣味性인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은 사랑이라 말한다. 남녀가 서로 기쁘게 사랑하기 위해 들여다보아야 할 것들, 경제적 결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남편과 아내의 생활 태도, 남녀에 대한 고정적인 선입견을 버리는 것,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종국의 길에 취미성趣味性을 실천하는 것, 그 실천의 중심에는 사랑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고, 여성의 해방을 넘어 자신의 삶에 열정과 예술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나혜석이 쓴 글 중에서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에서 그녀가 자살을 죄악시하는 부분에 나는 대체로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개척해야 할 자신과 서로 도우며 존중해야 할 사람들, 자신이 자란 가정, 공동체, 조국에 대한 바카라임감을 잊지 않았다는 부분은 깊게 가슴에 남았다. 평생 시대적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는 길을 이야기한 예술사상가 나혜석의 취미성趣味性을 기억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취미(hobby)라는 말은 여가활동이라는 지엽적이고 일반화된 의미이다. 요즘에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의미인 소확행을 추구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도 많다. 풍요와 결핍이 극으로 멀어지는 시대다. 초미세 버전의 취미가, 경제적 슬롯적 계층사다리가 끊겼음에도, 삶을 계속 잇게 한다. 짠하고 슬프다.
*Maslow, Abraham H. (1943). A theory of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Review, 50, 370-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