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자라기

권권拳拳

by서희복


비 오는 산에 가는 계절이다. 구름과 바람이 모두 뜨거운 여름에는 우비를 펼친다. 세상을 모두 덮을 듯이 두 팔을 활짝 위로 뻗으면 비가 조금 더 빨리 닿아 시원해진다. 중턱쯤 올라간 산길은 거센 비에 쓸려 길이 깊게 패인다. 두려운 길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기쁘게 들어선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별한다. 경계를 단호하게 긋는 문을 넘은 나와 아직 건너오지 못한 내가 서로를 떠나보낸다. 용기를 내지 못한 나는 문 뒤에 남아 있고, 고개를 들고 걷는 나는 이곳에 있다. 현재를 확신하지 못해 문 뒤에 머무는 내가 그리울 때면,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긴다.


승리의 환호성을 원했던 곳에서 눈물을 예견한다. 흥분과 욕망에 눈먼 날들에 대한 고뇌다. 빨리 달려 닿은 곳은 어디였는지 속도를 이기지 못한 기억이 시작도 중간도 끝도 흐릿하다. 바쁘게 해냈던 일들이 여유 있는 숨을 가져가고 남은 것이 숨인지 숯인지 가슴속이 까맣다.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 알 수 없다.


산 정상에서 보는 운해가 두텁다. 비가 몰아온 구름이 도시를 훔쳐가고, 머리카락을 세차게 스치고 가는 잔 안개에 얼굴도 축축하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진다. 그 구름 뒤에 존재하던 것들이 조금씩 드러날 때 과거를 지나온 흔적은 새 세상을 맞는다. 어쩌면 더 고스란히 본연의 모습을 하고 산에 걸린 구름을 단속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려가는 길은 살러 가는 길이다. 걸음마다 넘치는 빗물의 힘을 길어 간다. 발목마다 휘도는 세찬 물길을 디디며 그 보다 더 고된 세상을 가지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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