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금방 희미해지는 것 같아서

by어슴푸레

9월 말. 일주일 새 농촌 유학 종료가 행정적으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은행 앱으로 확인되는 체재비 입금 내역과 전기세, 통신비, 수도세, 주택 임대료 등 각종 요금 출금 내역이 가장 현실적이다. 고흥 살이 끝났어. 군청의 여성가족과와 인재육성과. 통장에 찍힌, 생경한 두 부서명이 그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지난 월요일. 서울 집의 세대주인 남편의 신분증과 도장을 지참치 않아 전입신고를 못 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동주민센터에 가야 했고. 모든 절차를 끝낸 후 아이와 서울대병원에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종로 3가 버스 정류장에서 초록색 종로 12번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돌아온 서울이 몹시 낯설었다.

전입신고 후 원적 학교로의 전학 신청을 하는 과정 중. 학교와 각 기관에서 알려준 정보가 서로 달라 결과적으로 아무 진척이 없는 상태로 시일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추석 연휴가 지났고. 발급받은 지 열흘이 지난 재학증명서는 쓸 수가 없어 고흥의 담임 선생님께 재요청을 해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모바일 전학 신청을 했다. 아이는 지난주 수요일,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만나 자퇴 의사를 전달했고 이후 학교에 가고 있지 않다.


명절을 앞두고. 오빠와 용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못 간다 통보식의 톡을 보냈다. 엄마에게도 아이들 코로나 핑계를 댔다. 그래서 추석엔 안 내려가냐는 아버님의 물음에 네. 짧게 대답했고 남편이, 친정이 불편하데요. 덧붙였다. 시집 나와 산 지 오래니 그럴 때 됐다. 어머니는 그 말을 끝으로 더 묻지 않으셨다.


명절이 지나 밀린 집안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여름 이불과 요 네 채를 욕조에 넣고 오래 밟았고. 고흥에서 새로 장만한 살림살이로 두 배가 된 주방, 욕실, 생활 용품을 반으로 줄여 이삿짐 플라스틱 회색 상자에 모조리 갖다 버렸다. 물때 가득한 양쪽 욕실을 왁스 풀어 벅벅 문댔고 욕실장에서 유통기한을 넘긴 채 먼지만 덮어쓰고 있는 보디로션, 오일, 컨디셔너, 손 세정제 등을 검은 비닐에 쭉 짜서 묶어 하늘색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안 쓰는 그릇과 플라스틱 용기와 접시를 분리배출용 가방에 넣었고 싱크대 상부장을 뒤집어엎어 식기의 배치를 대폭 바꾸었다.


언니는 이제 일상 복귀한 것처럼 똑같죠? 은아가 톡으로 물었고. 그래서 아쉽고 섭섭해요. 너무 금방 추억이 되는 거 같아서요. 마음을 적어 보냈다. 배추 모종, 무싹, 쪽파가 크고 있어요. 은아의 텃밭을 사진으로 구경하다가 그곳이 한없이 그리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명절 연휴 마지막 날,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남양면에서 자그맣게 과수원을 하는 이숙자 언니가 전화를 하셨다. 새로 이사 온 유학 마을 이웃에게 선물하려고 화분을 만드셨다고. 다시 이사 가서 너무 아쉽다면서 은아네 동을 물으시길래 답하고 다녀가셨다 전하겠다고 했다. 예원이와 예원 엄마를 위해 기도할게요. 상냥한 목소리에 저도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답했다.

9월 첫째 토요일. 상와마을에선 유학 마을 입주민과 마을 주민의 식사 자리가 있었다. 유학 마을 주민 환영회를 겸한 주민 친목 모임이었고 이양식 이장님의 주선으로 넉넉히 베풀어졌다. 한갑택 통학 버스 기사님의 운전 덕분에 편하고 안전하게 순천 인근의 고깃집에 도착해, 한우를 배불리 구워 먹었다. 어서 왔소? 이잉~서울! 왜 둘이만? 아들은 안 데불고? 그라지 그라지. 암만 서울이 여그보다 대핵 보내기는 펜하제. 버스 뒷좌석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이야기하시는 할머니가. 꼭 돌아가신 외할머니 같았다. 어이 한 기사! 나 잔 존 데 델고 가. 심심항께. 그르까요? 기사님과 70대 할머니의 대화가 정겹기만 했다.

은아네 아이들과 같이 봤던 <시간을 파는 상점> 연극. 대학로에선 2만 원은 족히 넘었을 표를 군민은 3천 원에 끊을 수 있었다. 네 배우의 생동감 있는 연기와 작지 않은 공연장에 한껏 들떠서 관람했던 9월 첫째 주 목요일 밤. 꿈을 꾼 듯 아련하다.

9월 30일 오후 6시. 9월이 채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고흥에서의 일들이 정말 추억이 되려 한다.


ps. 참 좋았던 송필용 작가님의 <물의 연대기> 고흥아트센터 무료 전시. 그리고, 고흥군립도서관의 독서 산간 바카라 배달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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