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번 버스를 타고 고흥에서 벌교로 나갈 때 보이는 차창 밖 풍경들은 한 폭의 그림이다. 교통카드로 삑. 고흥-벌교, 벌교-고흥행 군내 버스의 요금은 거리와 상관없이 일괄 1000원이지만 창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 값을 매길 수 없게 아름답다. 직선으로 쭉쭉 뻗은 중산 메타세쿼이아와 중산일몰전망대 아래로 드넓게 펼쳐지는 황금빛 논. 배경 같은 옥색 바다. 길가에 줄지어 선 뾰족뾰족 초록, 빨강 잎의 홍가시나무 옆으로 운교와 탄포와 침교와 택촌의 가지런하고 끝없는 논. 초가을이 다 되도록 진홍색 꽃을 매달고 있는, 계매에서 동강 가는 갈에 퐁당퐁당 심어진 배롱나무들.
200번대로 시작하는 하양 하늘색 고흥군 버스가 마주 올 때마다 111번 버스 기사님은 한 번도 빠짐없이 오른손을 올려 오른 이마 눈썹께에 사선으로 붙여 인사를 한다.
버스가 아닌, 승용차로 다녔던 고흥의 명소 역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인되어 있다.
몇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팽나무 군락으로 우거진 선정마을 월정해안방풍림과 바다를 둘러 조성된 스카이워크 너머로 반짝이는 윤슬, 우도의 레인보우교와 해 질 녘 간조로 드러난, 다리 밑의 노둣길. 팔영산 치유의 숲속에 울창한 편백나무들. 고흥우주발사전망대 아래로 넓게 펼쳐진 남열해수욕장과 파도를 가르며 유유히 서핑하는 남녀들.
그러나 가장 많이 그리울 곳은 단연 유학마을 단지와 상와마을이다. 거실 통창으로 건너다보이는 놀놀한 논. 바람 불면 파도치듯 일렁이는 벼 포기와 햇빛과 지열에 지글지글 끓듯 익는 벼 이삭. 풀색 철제 펜스 왼쪽으로 길게 늘어선 초록의 콩밭. 바람 따라 너울거리는 옥수숫대와 잔 잎을 달고 있는 아까시나무. 빙그르르르 도는 왕관 모양의 은빛 풍향계와 하늘 위로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아침이면 인사하듯 찾아와 비행 연습을 하다 뛰어내리다를 반복하는 흰눈썹황금새 두 마리. 까아악 깍. 가끔 울며 날아와 키 큰 소나무 위에 앉는 까마귀들. 탈. 탈. 탈. 탈.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반대편 골안마을 언덕으로 올라가는 빨간 경운기 한 대.
졸음에 겨워 연회색 시멘트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랫집 할머니네 순둥이 누렁이. 가로로 긴 2층의 무지개색 남양초등학교와 마을 골목에 빨갛게 낙엽 지는 벚나무 이파리들. 걸을 때마다 곁으로 팔랑팔랑 날아드는, 무늬 선명한 호랑나비. 하얀 불투명 대형 비닐에 일주일치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묶어 쓰레기장에 버리러 가면 마을회관에서 나와, 올라와 야그도 하고 놀다 가. 활짝 웃으며 말하시던, 흙빛으로 그을린 마른 얼굴의 할머니. 매주 수요일 오후1시 20분이면 어김없이 마을을 빙 둘러 울려퍼지는, 파란 만물 트럭의 "양파, 대파, 고추, 감자, 고구마 밀가루 있습니다아~" 스피커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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