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세요? 앞집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옥수수를 좀 삶았는데요. 아이들이랑 드시라고 가져와 봤어요.
-아이코.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지난 화요일. 영희가 택배로 보낸 찰옥수수 한 상자가 도착했다. 왼손으로 옥수수 자루를 쥐고, 오른손으로 껍질을 위로 쭉 잡아 당겨 훌렁 벗기고는 튀어나온 꼭지를 뚝 잘라 빈 박스에 던졌다. 주전자에 물을 받고 씻은 옥수수를 참방하게 넣었다. 열한 개가 다 들어가지 않아 네 개는 양손으로 뚝 분질러 주전자 속 빈 공간에 쏙쏙 채웠다. 물이 넘칠 거 같아 뚜껑을 열고 강불에서 40분 펄펄 끓이다가 중불로 줄여 뚜껑을 닫고 15분을 더 끓여 뜸을 들였다.
-엄마 옥수수 쪄요?
-응. 영희 이모가 보내 줘서.
-옥수수가 저녁이에요?
-아니, 간식.
찌고 니니 오후 6시가 다 돼 있었다. 그냥 이걸로 대충 때울까 하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쳤다. 넓적하고 커다란 원형 사기 접시에 잘 삶아진 옥수수 네 자루를 담고 도어록을 밀었다.
옥수수 잘 받았어. 감사히 잘 먹을게. 맛있더라. 다시 한번 고마워. 앞집에 몇 개 갖다 줬어. 텀을 두고 영희에게 톡을 하며 사진을 전송했다. 적은데 그걸 또 나눴냐며 멋지다는 답이 왔다. 적지 않다며 남편 것도 아들 것도 딸애 것도 있으니 더 보내지 말라고. 사 먹을 거니 더 마음 쓰지 마,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됐다. 앞집 동생과 통성명을 하고 친해진 데. 극 I임에도 똑똑. 두 번째로 문을 두드렸다. 표고버섯과 애호박을 볶고 계란말이를 부쳐 점심상을 차리려다가. 신발을 끌고 앞집 문간에 섰다.
-또 저예요. 혹시 점심 드셨어요?
-앗. 애들 남긴 빵으로 방금 대충 먹었어요.
-아. 반찬을 좀 해서. 같이 먹을까 하고요....
-지금 커피 내리고 있는데요. 식사하시고 천천히 건너오세요. 차 한잔해요.
-네! 이따 봬요.
후딱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명색이 처음 받은 초댄데 앞치마 바람은 아닌 거 같아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입술에 딸기색 틴트를 칠했다. 아차!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손에 쥐고 다시 도어록을 밀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2시간 남짓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지난 학기. 전북 장수에서 세 딸들과 농촌 유학을 했던 경험부터 그보다 몇해 전, 공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생활했던 이야기. 본가가 어디고 <농촌 유학의 모든 것>이라는 카페에서 요즘 핫한 곳은 어디인지 등. 이쪽 분야에 빠삭해 보였다. 태생은 초울트라 I이나 필요에 따라 슬롯적 E라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여기는 엄마들끼리 전혀 교류를 안 하는 거 같죠?
-그런 거 같죠?
-저희끼리라도 친하게 지내요.
-네 좋아요!
-다른 분들은 다 일하시는 거 같아요. 차들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에 올라오더라고요.
-그렇군요.
일하지 않는 두 엄마는 그렇게 마음을 열었다. 동생님이 내 명함에 박힌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끊은 나는 발신자 번호로 찍힌 번호를 동생 이름을 물어 저장했다. 건너가려는데 혹시 통토마토 드세요? 하며 양손 가득 머루포도와 찰토마토를 한 봉지씩 쥐여 주었다. 장수에서 이사 나올 때 펜션 주인이 밭에서 따 준 유기농이라며. 영희에게서 선물받은 옥수수를 나눠 먹은 것뿐인데 끝도 없이 자꾸 되돌아왔다. 정점은 저녁때였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컬리에서 오배송된 볶음밥, 큰애 편에 보낼게요. 나눠 먹어요. 죄 얻어만 먹기가 그랬다. 어쩐다 어쩐다. 언제 한번 밖에서 밥 먹자고 해야지, 맘속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앞집 동생에게 톡이 왔다.
-마트나 갈 겸 읍내를 가 볼까 하다가… 게으름 이슈로 주저앉았어요.
-앗. 저도 그럴까 했는데!
비가 그친 틈을 타 호미 들고 텃밭에 김을 매러 나간 동생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외출 준비를 했다. 컨디션 난조로 결석한 아이에게 상황을 말하니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일단 씻고 채비를 하라고 했다. 셋이 가도 좋겠냐고 톡을 보내고 혹시 불편하거나 오후 일정이 있으면 우린 따로 가도 되니 편히 말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좋다는 톡이 왔고 그럼 여기 갈까요? 녹동항 근처의 '수에즈 레스토랑' 지도 url을 복사해 톡방에 공유했다. 동생의 차를 타고 가서 파스타와 피자와 새우볶음밥을 시켰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커피를 시키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미리 계산을 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동생은 농촌 유학의 환상과 괴리로 인한 어려움. 농촌 유학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과 아쉬운 점을 아이에게 세세히 말해 주고 있었다. 환경이 어떻든 정말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고. 나와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에 깊은 위로를 받았다.
차를 돌려 녹동항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고. 유학 마을 단지로 돌아와 인사를 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편히 갔다 편히 왔네요. 아니에요. 맛있는 것도 먹고 좋았는데요! 또 봐요. 네!
이후 카톡은 고흥의 맛집 리스트를 공유하느라 한동안 번쩍거렸다. 그러다 거실 에어컨에서 물이 바닥으로 흥건하게 떨어져 있는 사진이 전송되었고. 전기 조심해요. 어떡해요. 주말이라 사람도 못 부를 텐데. 남편이, 배관 문제일 수 있다네요. 하는 등의 말들이 오갔다.
다음 날 아침. 묵은지를 씻어 물기를 꽉 짜고 결대로 찢어 된장 한 티스푼과 다진마늘 한 숟가락과 매실청 한 숟가락을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웍에 담아 타지 않게 올리브유를 둘러 뒤적인 다음 물 반 컵을 붓고 다시마를 두어 장 잘라 뚜껑을 덮고 하이라이터에 중약불로 올렸다. 묵은지가 지져지는 사이, 냉장고에서 오징어젓갈을 꺼내 볼에 부었다. 다진마늘 한 숟가락과 다진 파 한 숟가락과 생강가루 한 티스푼과 매실청 한 숟가락과 알룰로스 한 숟가락을 넣어 버무린 다음 잣을 뿌리고 참기름을 둘렀다. 국물이 졸아 자작해진 묵은지지짐의 불을 끄고 들기름을 두 바퀴 돌린 후 깨를 뿌렸다. 묵은지지짐을 식혀 그릇에 담으려다 반찬 통을 한 개씩 더 꺼냈다. 요 정도면 적으려나. 한 통엔 묵은지지짐을, 다른 한 통엔 오징어젓갈을 담았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갖다 줘야지. 냉장고 한쪽에 반찬 두 가지를 따로 두었다. 저녁때가 되었고. 한 사람에 두 개씩은 돌아가야지. 입가심하라고, 마트에서 사 온 무화과 상자에서 여덟 개를 꺼내 직사각 플라스틱 통에 담아 반찬과 함께 가져다주었다.
티타임 한 번에 점심 식사 한 번. 나흘 동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만남을 가졌다. 내가 먼저 앞집 문을 두드렸다는 말에 엄마가? 하고 딸이 깜짝 놀랐다. 삶은 옥수수를 갖고 문밖을 나선 그 일이 인(因)이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서로 마음을 나눈 것이 연(緣)이 되었다. 인과 연이 만나 '농촌 유학 이웃'이라는 싹이 틔워졌다. 앞집 동생과의 시간이 옥수수알처럼 알알이 여물어 가기를 조심스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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