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기 전에 프리패스

by어슴푸레

요즘 가장 많이 하고 또 많이 듣는 말은 '내려가기 전에'다. 가족 간에 빈번한데 남편과 내가 제일 많이 한다.


-내려가기 전에 세탁기 해결하고 가.

-내려가기 전에 딸한테 안 쓰는 물건 좀 정리하라고 하고.

-내려가기 전에 식단 짜 주고 가.


세탁기는 고치는 비용과 중소기업 제품 가격이 얼마 차이 안 나 하이마트 가서 사 버렸고. 몇년 전 유행한 도무송, 떡메, 스티커 등 열심히 사 모으고 방치해 두었던, 작은애의 포용계 용품들을 싹 갖다 버렸고. 동시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소파 탁자를 빼기 앱으로 수거 신청 해 큰애와 주차장 옆 공터에 내려다 놓았다. 식단을 짜 준들 해 먹을 것 같진 않아 냉장고를 열심히 뒤져 가능한 한 다양하게 집밥을 하고 있다.

그러다 판이 커져. 어느 날은 냉동 화석 상태의 소갈비를 꺼내 2시간 동안 갈비탕을 끓였고. 또 어느 날은 친정 갔다 받아 온 토종닭을 삶아 한 김 식혀 결대로 찢어 닭곰탕을 끓였다. 엄마 맛있어요. 내려가기 전에 갈비탕 또 해 주면 안 돼요? 큰애의 그 말에 마음이 짠해서 시장에 가 소갈비 1.8kg를 9만 원어치 좀 넘게 사서 반을 끓이고 반은 주말에 한 번 더 해 주려고 냉동시켰다.

내려가기 전에 안방의 침대 커버와 스프레드와 이불을 욕조에 넣고 물을 받아 오래도록 밟았고. 뽀송하게 마른 이불과 가져갈 베개의 커버를 갈아 끼워 보자기에 쌌다가 풀고 그 대신 홑이불과 스프레드 두어 장을 이불 가방에 넣었다.


부엌과 거실을 오가다 한 번씩 생각나는 것부터 짐을 꾸리다가. 소형 전기 정수기를 들이면서 남편 방에 쌓아 뒀던 브리타 정수기와 필터를 챙겨 종이백에 담았다.


엑셀을 열어 이삿짐 목록을 만들고 준비 전과 준비 완료, 가서 살 것과 온라인으로 배송해 둘 것을 구분해 5일째 업데이트하다 보니 어느새 버전 10이 됐다.


진공 청소기와 물걸레 청소기, 옷가지와 화장품. 노트북과 아이 짐. 신발과 가방. 드립용 커피 도구와 공부하고 읽을 바카라 등. 과연 다 실릴까. 차 트렁크의 너비와 아직 반쯤 남은 짐들의 부피를 가늠하다. 풀고 빼고 교체하고 싸는 일을 무한 반복 하다 보면 남편 퇴근 시간이 훌쩍 돼 있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하고 몇날 며칠 쓸고 닦느라 어디 앉지도 않았었다. 12년이 흘렀고 그러는 사이 집 이곳저곳이 많이 낡았다. 하얀 방수 페인트 칠이 벗겨진 베란다 천장, 퓨즈가 나가 버린 거실 간접 조명, 햇빛에 색이 바랜 나무 거실장, 장마에 우글해진 벽지, 유리창에 판박이 스티커처럼 자국이 남은 뽁뽁이.


이사를 가기 위해 집을 정리하는 일은 어딘가 쓸쓸하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냉장고 속 음식들이. 찬장 속 소스들이. 흰색에서 아이보리로 변한 하이그로시 싱크대가. 가스오븐의 바스라지기 직전으로 삭은 철 손잡이가. 함께 나이 들고 있었음을 바로 보게 해 주어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내려가기 전에 프리패스'를 여기저기 남발하다 깨닫는다. 매듭지을 일들을 끝내 해치우듯. 선물처럼 주어지는 매일을 미루지 않고 기쁘게 살아야 함을.

어디가 됐든. 있는 그곳에서 중심 삼으면 그 자리가 모두 참되다는 지난 약사재일 때의 광해 스님 법문을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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