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에서 겹겹의 렌즈가 빠져나오는 꿈을 꾸었다

by어슴푸레

언제부턴가 꿈을 꾸지 않았다. 고로 께름직한 꿈에 아침부터 기분이 개운치 않은 일도 없었다. 잠들기 전, 지는 태양을 명치쯤에 그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처 머릿골에 잔잔한 바다의 수평선을 떠올린 후 숨을 내쉬다가. 명치께의 태양과 머릿골의 물결을 마주 보듯 양쪽 쇄골 뼈 앞머리에 있는 빈 공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침대에 누워 이렇듯 일상관, 수상관, 지상관을 반복하면 심신이 고요했고. 그 상태로 관세음보살을 열 번쯤 부르면 잠이 폭 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약사사에서 수계를 받은 7월 2일. 오른 팔뚝 안쪽에 붉은 점처럼 생긴 향불 자국을 왼손으로 쓸며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을 세 번 외운 후 자리에 누웠다. 연비(燃臂) 의식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향불이 살갗에 닿을 때 번뜩 들던 정신. 그 따끔함이 찰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는 태양을 명치에 그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골에 잔잔한 바다의 수평선을 떠올리다 숨을 후 하고 놓았다. 다시 명치께의 태양과 머릿골의 물결을 마주 보며 능연했다. 그러고 목 아래에 위치한 쇄골 뼈 앞 빈 공간에 정신을 모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다 잠이 들었다.


거울을 보는데 양눈에서 겹겹의 소프트렌즈가 빠져나왔다. 너무 놀라 스윽 눈가를 문지르자 검지손가락에서 렌즈가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거울을 다시 보니 내 얼굴 같지 않았다.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모습. 낯설다. 낯설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너무 생생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뭘까. 뭘까. 문득 알아졌다.


두 눈 밖으로 빠져나오는 겹겹의 렌즈는. 그동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못 보게 가로막고 있던 아집과 업장일 수 있겠다. 그 렌즈들이 검지 위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진 건. 사는 내내 괴롭히던 집착과 어리석음이 불법의 지혜 속에서 완전히 사라짐을 뜻할 수 있겠다.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었던 건. 껍데기가 벗겨진, 본래의 나를 목도해서였을 수 있겠다.


오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해 놓고 공원에 갔다. 맴맴맴맴 매앰-. 매미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다. 흰색, 연노란색, 연초록색의 나비들이 여기저기서 너울거렸다. 깨어 있는 사방은 찬란했다. 벤치에 앉아 나무를 앞에 두고 사진 찍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님. 예원이가 조퇴하고 싶데서요. 11시 20분쯤 하원할 것 같습니다. 위클래스 선생님의 전화였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를 기다렸다.


의기소침해 있는 딸애를 가만히 안았다. 고생했어. 집에 가자. 손을 잡고 걸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기말고사 끝난 아들애가 야호! 드디어 시험 끝났어요. 나에게 환호하며 말했다. 햄버거랑 떡볶이 먹을까?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험 끝났으니 맛있는 거 먹어야지. 두 애가 식탁에 앉아 사이 좋게 햄버거 먹는 걸 감상하듯 바라봤다.


큰애가 친구들과 반포까지 자전거 라이딩을 하러 나갔다. 심심해진 딸애가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설득과 회유 과정 중에 감정이 고조됐다. 더 가서는 안 돼. 목소리 벌써 높아졌어. 그냥 들어. 화내지 말자. 말자. 말자. 그러나 또 빵. 번뇌는 없앤다고, 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지. 하. 또. 하....... 쾅. 방문을 닫은 작은애가 문을 잠갔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새어 나올세라 마스크를 쓰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둘레길을 걸어 올라갔다. 가방에서 염주를 꺼냈다. 불자들에게 광해 스님께서 주신 108 염주가 길게 늘어졌다.


경내에 들어 합장을 하고. 삼신각 쪽으로 몸을 트는데 한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광해 스님이셨다. 기도하려고 왔습니다 스님. 열심히 하시네. 그럼 올리다 가세요. 반배를 하고 대웅전에 들어갔다. 좌복과 법요집을 챙겨서 관세음보살 상 앞에 섰다. 상단과 신중단. 영가단에 삼배를 올리고. 염주를 좌복 오른쪽에 놓고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뚝뚝뚝뚝. 뚝뚝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마스크 안에서 눈물과 콧물이 뒤섞였다. 눈이 실시간으로 붓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알아졌다.


번뇌를 없앨 수 없다면. 끊을 수 없다면.
안아 버리면 되겠구나. 공원에서처럼.
포용해 버리면 되는 거구나.


관세음보살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


울음이 잦아들었다. 정신이 맑았다. 법요집을 펼쳐 천수경을 외웠다. 왼손 검지손가락에 염주를 걸고 한 알 한 알 돌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참회하며 정근을 했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간밤에 꾼 꿈이 다시 한번 떠올려졌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입밖으로 참회진언을 외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걷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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