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부터 시작한 반야심경 필사. 공바카라 권수가 늘어 갈수록 어느 한 부분이 치우쳐 써지던 한문 필체도 점차 안정을 찾아 가로세로 반듯한 네모 칸 속에서 균형을 이뤘다. 첫 장을 쓸 땐 힘을 과하게 준 나머지 앞장의 글자가 뒷장에 압인되어 움푹 들어갔고. 그 자리에 다른 글자를 이어 눌러쓰면서 공바카라의 종잇장은 전체적으로 우글우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문 노트를 한 권 다 썼을 때. 한자가 쓰인 곳마다 올록볼록한 무늬가 새겨졌고. 도드라진 그 무늬를 한 번씩 점자 읽듯 엄지손가락으로 쓰윽. 만지며 감상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네 번째 공바카라에 필사를 하던 중. 집에 두기보다 태우는 편이 낫겠다 싶어 종무소에 가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기초 교리반 불자인데요. 사경한 노트를 어떻게 태우면 좋을지 스님께 여쭈었는데 백중에 태워 드리면 좋겠다고 해서요. 여기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지, 비용을 드려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아. 비용은 따로 주시지 않아도 되고요. 절 입구의 매점에서 지옷을 사서, 그 속에 사경바카라을 넣은 다음, 대웅전 뒤쪽에 모셔진 영단 근처의 소전함에 넣으면 백중날 한꺼번에 태워 드려요. 아니면, 백중날 10시 전에 대웅전에 올라가서 상단에 필사바카라 올리고 3배 드린 다음, 바카라을 다시 내려, 소전함에 넣으셔도 되고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매점 문을 여니 왼쪽 창가에 지옷이 색깔별로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필사바카라 넣어서 태울 지옷을 사려는데요. 얼마일까요?
-5천 원이요. 근데 필사바카라을 왜 태워요?
-아. 반야심경을 쓰고 있는데요. 갖고 있는 것보다 태우는 게 좋다는 말을 들어서요.
-아니! 사경바카라은 그 어떤 부적보다도 힘세고 영험한 건데. 그 좋은 걸 왜 태우려고 그래.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시거나 자기 돌아갈 때 같이 관에 넣어 태우면 좋아요. 그냥 갖고 있어요.
-아 그래요?
-응. 그냥 지옷에다 본인 이름이랑 주소, 영가 성함, 관계만 적고. 대웅전 뒤로 돌아서 두 번 절 하고. 지옷 박스에 갖다 넣어요. 그럼 돼.
-네.
-누구 하실 건데?
-은사님이요.
-아아. 좋은 일 하시네.
지옷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나로서는 모든 게 신기했다. 같은 말인 지의(紙衣)를 사전에서 보기는 했어도, 실물로는 본 적 없는, 글로 익힌 단어였으므로. 백중날도 그랬다. 음력 7월 15일이라는 날짜도. 영가 천도의 재일이라는 것도. 하안거를 마쳐 스님들의 청정한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하는 날이라는 것도. 생소하기만 했다. '영가천도다라니옷'이라 쓰인 파란 봉투 위에는 종이옷, 지전(紙錢), 다라니 종이가 그려져 있었다. 매점의 보살님이 일러 주신 대로 지옷 겉면에 인적 사항을 적은 다음, 대웅전 뒤쪽으로 갔다. 흰 천막이 쳐진 영전에 영가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신을 벗고 자주색 좌복에 무릎을 꿇어 두 번 절을 올렸다. 선생님, 더는 아프지 말고 극락왕생하세요. 온 마음으로 빌었다. 몸을 일으켜 신을 신고 소전함에 지옷을 떨어뜨렸다.
며칠이 지나고. 문득 궁금해졌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쓴 사경 공바카라을 남을 위해 태우는 것이 맞는지. 나의 번뇌가 상대에게 옮겨가는 건 아닌지. 제미나이가 답했다.
-비록 내 업장 소멸을 위해 한 사경이라 해도, 한 자 한 자 쓰면서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졌다면 이미 나에게 거대한 정신적 공덕(에너지)이 쌓인 것입니다. 이 맑고 깨끗한 공덕을 "내가 가지지 않고, 돌아가신 조상님이나 은사님의 극락왕생을 위해 바칩니다."라고 마음을 돌리는 것이 회향이므로 지혜의 결과물(사경바카라)을 바치는 것은 후손이나 제자가 올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선물입니다.
그제야 매점 보살님의 말이 이해되었다.
흰 종이를 한 장 접어 사경 공덕 회향 발원문을 썼다. 그리고 그것을 첫 번째 사경 노트에 풀로 붙였다. 다음 주 수계식이 끝나면 소전함에 갖다 넣을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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