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는 마음

by어슴푸레

그 어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건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그릴까 궁리하는 것과 일견 비슷하다. 요즘 내가 그렇다. 지난 금요일, 작은애의 농촌 유학 신청서를 위클래스 선생님께 보냈고. 그 이틀 전쯤 윤기, 경신 샘, 윤희 샘, 이수미 선생님, 영희, 하라 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결과가 나오면 그쪽에 전입신고를 하러 가야 하니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이 되면 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당초 6개월을 예정했으나 아이는 거기서 졸업까지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예정에 두고 있던 일들을 무한정 미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남쪽 끝. 남편 없이 지낼 2년 반의 시간이 비현실적이다.


지방으로 1년 넘게 내려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봉 교수님께 말씀드리자 pc에 개인 문서가 저장돼 있다면 삭제를 부탁한다는 회신이 왔다. 새 연구원 충원과 맞물려 바카라상이 모자라구나 싶어 곧 연구실에 들러 짐을 빼겠다고 했다. 학교에 오면 시간 맞춰 얼굴 봤으면 한다셨지만 주말에 갈 가능성이 커서 어려울 것 같다고, 그동안 감사했다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23년 3월. 연구실에 짐을 히나둘 가져다 놓으며 3년 안엔 졸업하겠지. 이곳에선 일이 아닌 연구를 해나가겠지 꿈꾸었었다.


3년이 지났고. 신분은 여전하고. 짐마저 빼면 연구원이 아닌 그야말로 프리랜서가 된다. 난생처음 살아 보는, 소속 없는 삶이다.


지난주 불교 교리반 간식 타임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 저는 부처님 제자일 뿐인걸요.

-아니. 무슨 일 하시느냐고요.

-글쎄요.


쓰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웠다. 예전 온라인 게임을 들먹이고 싶진 않았고 직업이 내 자신이 아님을 깨우친 이상 다른 말들은 군더더기 같았다.


오늘 일본어 수업 때. 다음 주에 고베 등지로 여행 가는 J 상에게 다음 수업에 못 보니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고 다음 달부터 수업이 분기별로 이뤄지는데 8월에 지방으로 한 2년 내려가 있을 거라 한 달만 수강이 불가해 그만 들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마사코 센세께 일본어로 손 편지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수업이 끝나고 작은애와 점심을 먹고 게으른 오후에 들렀다. 바카라바로 서비스로 빌린 바카라을 반납하고 대표님과 담소를 나누다 <겨울어사전>과 <여름어사전>을 샀다. 향후 <마음 번역 사전> 공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누면서도 차마 다음 달쯤 이사를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 주엔가. 이숲오 작가님 북콘서트가 있다는 글을 읽었다. 신청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구글 폼에서 벗어났다. 떠나기 전에 보고 싶은 얼굴들. 만나면 그곳에서 힘들 때마다 위안이 될까, 적금 들듯 그 시간을 간직해 볼까 싶었으나 공연히 뭘. 그러고 마음을 접었다.


교리반 수업은 총 3회가 남았고. 송별회 식사 자리가 끝나면 그 인연과도 공백이 생긴다. 감사한 연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매일매일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듯 지내는 마음은 어딘가 쓸쓸하다. 부모님께는 언제쯤 말할 수 있을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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