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할 때 필요한 게 주어졌구나

by어슴푸레

-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 종이에 그려 보시겠어요?

-쓰면 안 될까요?

-그림이 더 많은 걸 보여 주기도 해요. 조금이라도 그려 보세요.

-네.


-설명해 주시겠어요?

-왼쪽부터. 아버지시고요. 돈이고. 갓 지은 따뜻한 밥이고. 바카라장이랑 바카라이에요. 팔삭둥이인 저를 아버지가 인큐베이터에 넣고 살릴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세상에 없었겠죠. 집 살 돈을 제게 쓰신 거라 어릴 때 가장 큰 돈의 단위였던 10,000원을 그렸어요. 반찬이 많진 않았지만 늘 새 밥을 먹었던 것 같아요. 종류는 적었지만 집에 바카라이 있었고. 저는 그중 그림바카라을 가장 좋아했어요.

-가운데는. 중학교 2학년 때예요. 손에 연필을 쥐고 계신 분은 조찬용 선생님이시고. 옆에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절친 윤기예요. 그 아래엔 바카라과 시집이고요. 하단은 우거진 숲과 나무예요. 영복여중은 향나무 말고도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있었어요. 나무는 지금도 좋아해요. 나무 많은 길을 걸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정리돼요.

-오른쪽. 맨 위에 있는 건 사람들이에요. 여기저기서 알게 되고 연결된 사람들. 퇴직하고 첫 해는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작년. 그리고 특히 올해. 저를 둘러싼 판이 싹 바뀌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아요. 전혀 새로운 인연이 오고 있다는. 인생의 한 장이 닫히고 새로 열린 느낌요.

-이건 염주.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현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노트북이요. 글로써 사람들과 소통하고. 글로써 일을 해 벌이를 하니까 아주 많이 중요하죠. 옆에는 바카라이 쌓여 있고요. 그리고 맨 아래엔 우리 네 가족이에요. 남편, 아들, 저, 딸. 단단하게 서서 한 곳을 바라보며 웃고 있어요.


-그림을 보고 뭘 느끼셨어요?

-필요할 때 필요한 게 주어졌구나. 정말 감사하게도.

-또요?

-글쎄요. 다른 건 잘.

-그러시군요. 저는 사람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과, 점점 항아리 안이 꽉 차고 있다는 게 보여요. 그리고 어머님은 사람 속에서 의미를 찾는 굉장히 관계 지향이라는 것도요. 그다음은. 바카라이 모든 인생의 주기에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는 게 보이네요.

-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내담자 분은 그게 어디든 자신이 있는 곳에서 큰 역할을 하시게 되는 듯해요.

-그런가요?

-국어원에서도 그러셨고. 지금 교리반에서도 그러시고. 바카라방에서도 그렇고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때마다 힘들진 않으세요?

-아뇨. 전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기뻐요. 남을 돕는 게 좋아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건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그 첫 번째였고. 죽을 만큼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선생님과 윤기가 두 번째였어요. 그래서 지금 이만큼 곱고 좋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요. 앞으론 제가 받은 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싶어요.


결국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이라는 걸.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베푸는 삶. 그 속에서 원만구족한 삶. 나아갈 삶의 방향이 또렷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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