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있는 '소문의 낙원'

by어슴푸레

그날 그 방향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거실 마룻바닥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흰 빛이 그쪽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창가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는 한 여성이 창밖의 한 여성의 시야에 마침내 들어왔을 때. 그날로 그곳은 마음 한편에 영영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그날 나는. 몰입하여 바카라을 읽고 있는 그 여성의 오라에 열려던 바카라방 문의 고리를 쥔 채 멈춰 있었다. 그러곤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글자를 적고 내처 가던 길을 갔다.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는 와중에도 채도 낮은 네이비색 간판을 탁자 삼아 펼쳐진 상앗빛 바카라 로고. 그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게으른 오후' 다섯 글자가 오래도록 생각났다.


집에 돌아와 녹색 검색 창에 상호를 넣었다. 예약 가능한 날짜가 없어 그 다음 주의 적당한 때를 캘린더 창에서 클릭했으나 끝내 확정은 누르지 못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고. 3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상담이 있는 화요일, 상담 2시간 전으로 맞춰 예약을 했다. 조지 오웰의 글쓰기 공간을 선택했다. 그 여성이 바카라을 읽던 창가의 그 자리였다.


오후 3시. 문을 열고 들어갔고. 대표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히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커피와 홍차가 있는데 어떤 걸 준비해 드릴까요?

-따뜻한 커피로 부탁드려요.

-네. 이건 바카라바로 서비스로 빌리신 바카라이고요. 여기 있는 바카라들 편히 보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 탁자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자체로 그림이었다. 몇 주 전 창밖에서 보았던 그녀처럼 나도 그러할까 잠깐 생각했다. 빌린 바카라을 다 읽고. 바카라장에서 눈길이 가는 바카라을 뽑아 빠르게 훑었다. 공간이 주는 에너지에 편안하고 편안했다.


-잘 읽었습니다. 커피도 잘 마셨습니다.

-또 오세요!

-네, 그럴게요. 여기 분위기, 정말 좋아요!


그것이 게으른 오후와의 첫 만남이었다. 또 몇 주가 흘렀고. 이런저런 일들로 가지 못하는 날이 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테라리움 원데이 클래스가 다음 주 오전 10시에 있을 예정인데요. 시간 되면 놀러 오세요.


일러 주신 계좌로 참가비 1만원을 입금하고 며칠 후 두 번째 방문을 했다.


'선택을 심어요'라는 그림바카라 테라피 클래스로, 이끼와 식물을 유리병 속에 넣고 탁상용 정원을 만드는, 꽃마리 신수연 작가님의 강좌였다. 활동지를 받고. 각자 적은 다음. 돌아가면서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 둘러앉은 열 명 남짓의 여성은 모두 친해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고. 우연히 지나다 이끌려서 예약을 하고 왔다가. 대표님이 연락을 주셔서 오게 되었다고 짧게 말했다. 1시간 반쯤 지나 각자가 완성한 테라리움을 테이블에 두 줄로 늘어뜨리고 사진을 찍었다. 대표님과 작가님께 인사를 하고 바카라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2주 후. 문지혁 작가의 북토크가 오후 3시에 있었고. 참석을 위해 세 번째 방문을 했다. 이전보다 많은 인원이 바카라방을 가득 메웠다. 작가님께 소설가로서의 여정을 듣는 동안, 낱낱의 점을 이어 선을 만들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쓰는 사람'의 소명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문학의 횡적인 다양성과 종적인 다양성에 대해서도. 그러면서 나의 글은 어느 좌표에 위치해 있을까 자문해 보았다.


다시 몇 주가 흐르고. 서향라 작가의 디지털 AI 리터러시 강연을 듣기 위해 네 번째 방문을 했다. 오전 10시였고. 클로드 앱을 깔고. 프롬프트를 세밀하게 조건 지어가며 원하는 자료를 만들어 냈다. 조작이 서툴러 작동법을 잊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찍지 마세요. 제지하는 말에 네. 해 놓고 깜빡. 또 사진을 찍고 말았다. 찍지 마세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핸드폰을 뒤집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오전 10시.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인생 독서*인생 서점' 프로그램 회의 차 다섯 번째 방문을 했다. 일전에 대표님께서 제안서 관련한 아이디어를 요청하셔서 도와드린 것이 덜컥 공모에서 선정되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두 번째 방문에서 네 번째 방문을 하며 익힌 얼굴들이 와 있었다. 이번 미팅에 대한 대표님의 설명이 있은 후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여섯 명의 인생 서사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저마다 걸어온 인생의 길. 다른 듯 같게 읽고 쓰는 삶을 산다는 공통점만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서로를 향한 눈빛은 조용하면서도 뜨거웠다. 그것은 신뢰와 지지였다. 2시간이 좀 안 되게 자유로이 생각을 나누었고 대강의 아우트라인이 잡혔다.


그 프로그램의 개설이 그제, 게으른 오후 인스타를 통해 공개되었다. 대표님께서 강사 단톡방에 포스터를 올려 주셨다. 훈훈한 이야기와 덕담이 오갔다. 연대의 느낌에 마음이 따뜻하고 꽉 찼다.


게으른 오후에 갈 때마다 악뮤의 '소문의 낙원'이 생각난다. 거의 자동으로 재생되는 느낌이다. 방화동에 하나밖에 없는 서울형 바카라방. 동네 사랑방 같기도 하고, 인문학 아지트 같기도 한 이 공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과연 '소문의 낙원'이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하고 회향할 수 있음에,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 이어 갈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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