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생을 받아들이는 일
지난 금요일, 일본 다큐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보고 왔다. 상영관이 많지는 않아 집에서 1시간도 넘는 거리에 있는 상영관까지 다녀와야 했다. 왕복 2시간이 수고였다고 말하기도 무색할 만큼, 여운은 짙게 남아 영화는 내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았고, 근 일주일 동안은 매일 저녁 남편과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의 주어는 조현병 딸의 부모를 적중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들이 틀렸다"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후회와 무관하지는 않다. 이 질문은 이미 지나가 버린 가능성을 되짚는 반사적인 질문이며, "다른 선택이 가능했다"는 전제가 희미하게라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는 감독의 시선과 의도가 들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감독 또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다만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감독은 영화에서 감독으로 존재하고자 하였을까, 혹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되고자 하였을까. 전자라면, 자신의 시각을 관객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며, 후자라면 관객의 시각으로 (본인이 부모를 도덕윤리의 심판대에 올려놓았듯) 자신 또한 도덕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영화감독이라면 단편적인 사람은 아닐 터, 후자일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후에 감독의 인터뷰에서 실제로 그러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좀 더 깊게 음미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고 질문하기보다는, "당시에 감독은 이 이야기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이었구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냥, 그랬구나."이다. 부모도 불완전했고, 감독 자신도 불완전했으며, 그 사이에서 희생되었다고 여겨지는 딸 역시 정말로 희생된 것인지 제삼자가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불완전한 시대에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어떠한 선택을 하며,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소상히 보여주는, 그냥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제 여동생이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 감독 인터뷰 중(출처: 統合失調症の娘を病院に連れて行かず、自宅に閉じ込めて…それでも精神科医が「ご両親の判断は正しかった」と断言した理由 『どうすればよかったか?』藤野知明さんインタビュー#3 | インタビュー・対談 - 本の話)
우리의 보편타당하고 도덕윤리적인 (혹은 그렇게 여겨지는) 선택들은, 현재로서는 아무리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고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때의 옳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가 과연 과거의 그것을 비난할 수가 있을까?
다음 세대가 "그때 왜 그러셨어요?"하고 따져 물을 때, 이전 세대가 "미안하다. 그땐 몰랐구나."하고 쉬이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빙빙 돌려서 무어라고 답변을 하지만, 다음 세대에게 그것은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워낙 아동정신에 대한 지식이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지다 보니 부모의 모든 양육행동에 대하여 도덕윤리적 판단이 크게 가해지곤 한다. 그게 오늘날의 문화이며 그만큼 오늘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죄바카라감도 커졌다. 그러나 그것을 비교적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받아들인 우리 세대가 윗세대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며, 동일한 죄바카라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진 새로운 지식이다.'라고 말해 보아야 "어휴, 지겨워. 또 뭐.", 혹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라는 소리밖에는 듣지 못할 것이다.
정신병이라는 것은 더 극단적인 사례일 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런 식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크고 작게, 많은 가정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에서 감독의 신념은 누나를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서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가능하게 된 시점이 있었다. 바로 부모의 돌봄 역량이 무너졌을 때였다. 2008년 무렵 어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심해졌고, 고령의 아버지가 아내와 딸 두 사람을 함께 돌볼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입원에 동의했다. 어머니의 인지기능 저하와 아버지의 노쇠함으로 기존 방식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감독의 오랜 기간의 소원이 실행되었다. 감독의 신념은 오랜 기간 부모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그의 신념이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은 마침내 도래하였다.
대학생 때, 한 교수님이 자신의 인맥들과 함께 회식자리에 초대해 주신 적이 있었다. 그때 프랑스 출신의 한 국제기구의 높은 인사 분이 계셨고, 우리는 그분에게 질의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한 독일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그 학생의 질문의 내용인즉슨, 젊은이의 관점에서 부도덕하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노인들의 고정관념, 즉 낡은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평소 상당한 답답함과 분노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질문도 꽤 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국제기구 인사분의 답변은 내게 꽤 충격적이어서 그날 다른 대화는 아무 기억이 안 나지만 유독 그 질문과 답변만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분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건 바꿀 수 없다. 그분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들은 어차피 너보다 일찍 죽는다. 중요한 것은 그 후다. 너의 때가 올 것이다. 기다려라. 그리고 그때를 준비해라."
감독 또한 이를 반쯤 실천한 셈이다. 부모의 시대에 결국 부모를 바꾸지 못했지만 대신 기록을 남겼고(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때가 되어 누나를 진료 및 치료받게 했고, 자신에게 발언할 때가 온 뒤 영화를 공개하였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누가복음 5장 36-39절
이 영화는 동생의 회고적 시선과 2008년의 치료 호전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부모의 가정 돌봄은 사랑의 노동보다 치료를 차단한 폐쇄체계로 읽히고, 병원은 구속의 공간보다 뒤늦게 열린 회복의 통로로 읽힌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가정의 돌봄도, 병원의 치료도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이를 영화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관점으로 그려낼 수 있다.
영화《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는 아이의 높이에서 세계를 본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생활도 아이에게는 놀이와 모험으로 보이며, 아동보호기관의 개입은 안전한 구조라기보다 엄마와 아이를 찢어놓는 폭력처럼 체험된다. 영화가 아이의 상실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제도는 침입차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또한 카메라를 조금만 옮기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 부모의 시선이라면 믿을 수 없는 정신병원으로부터 딸을 지키며 수십 년간 직접 돌본 노부부의 이야기도 될 수 있고, 누나의 시선이라면 자신이 병들었다고 규정하는 세상과 가족 사이에서 살아간 한 여성의 이야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한쪽도 전체가 아니다.
가족은 사랑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고, 제도는 보호하기 위해 분리할 수 있다. 반대로 가족은 세상이 감당하지 않는 사람을 끝까지 품을 수 있고, 제도는 가족 안에서 불가능했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실제 세계와 실제 인생에는 보호와 통제, 사랑과 부담, 자유와 위험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누나의 생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조현병을 앓고 지낸 25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며, 사람들은 아버지가 누나의 장례식에서 "딸의 생애는 어찌 보면 충만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 분노하지만, 정작 누나 자신이 자신의 생을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누나는 점성술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아주 깊게. 어머니는 점성술이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누나도 그걸 알게 되었을 거라고 옆에서 말한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정작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나가 뉴욕에 갔을 때, 결국 돌아와야 했지만 (찾아간 곳이 진정으로 사기조직이었을지언정) 그 행동을 그저 충동적 행동의 범위가 매우 컸다는 하나의 사례로 여길 뿐, 그 행동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여겨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점성술은 누나에게 단순한 취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점성술에 몰두했을 뿐 아니라 공부했고, 여행했고, 바카라으로도 펴냈다. 이것을 어떤 수동적인 망상이나 무의미한 반복, 신경증적 '증상'이나 '별난 취미'로 보기에, 그녀는 오랜 기간 관심을 지속하고 탐구하였으며 슬롯적 결과물로 만들어냈다.
생각해 보면 누나의 삶은 서로 다른 가족의 서사에 의해 설명된다. 부모의 이야기에서 누나는 부모의 연구를 돕고 가족 안에서 나름대로 충실한 삶을 산 딸이었다. 감독의 이야기에서 누나는 25년 동안 의료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치료받았다면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부모의 부정 때문에 그 가능성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나 자신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버지가 장례식에서 누나와 함께 쓴 논문을 관에 넣을 때, 누나가 스스로 쓴 《비밀의 서양점성술》은 그 자리에서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누나는 25년을 잃었다”는 표현이 불편해야 한다. 여기에는 치료받지 않은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 물론 누나는 물론 많은 가능성을 제한당했다.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한 때도 있었고, 슬롯적 관계와 직업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 조건 안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배우고, 여행하고, 무언가를 세상에 남겼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그럴까. 나름대로 열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바카라 한 권 펴보지 못했는데, 그 분야, 수준, 내용을 막론하고라도 어쨌든 열정을 불태웠을 그녀가 어떤 지점에서는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생이 기록되고, 남겨지고,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애도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도 그녀는 여전히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픔 지점은, 가족 중 누구도, 심지어 감독조차도 누나가 직접 쓴 바카라을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실이 이럴진대, 만약 정신병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맨 정신으로 그녀는 그녀의 관심과 열정을 표현이나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완벽한 순간을 누릴 수도 있고, 완벽한 업적을 달성할 수도 있지만, 이 지구에 살아온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한 인생을 살아본 적은 없다.”
- 알랭 드 보통, 《현대 슬롯 생존법》, p. 230
현대슬롯는 삶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지식과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고, 적절한 선택을 제때 내리기만 한다면 고통과 실패를 피하고 온전한 삶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현대 슬롯 생존법》에서 이 집단적인 꿈의 여파가 “재앙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완벽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을수록, 실제로 살아낸 불완전한 삶은 쉽게 실패로 판정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을 비롯하여 모든 관객들은 서로 다른 완벽한 누나의 인생을 상상한다. 부모는 딸이 충실히 의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따서 가족의 명망을 높이는 인생을, 감독은 제때 치료받아 병을 회복하고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관객들 또한 부모의 기대와 통제로부터 벗어나 치료받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떠올린다. 각각의 이상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상을 기준으로 실제의 누나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물론 누나가 겪은 억압과 치료받지 못한 시간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낸 25년 전체를 허송세월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다르다. 누나는 상처받았지만 살았고, 제한당했지만 욕망했으며, 병을 앓는 중에도 배우고 여행하고 무언가를 남겼다. 한 인간의 삶에는 피해와 성취, 억압과 자유, 병과 열망이 반드시 어느 하나로 정리되지 않은 채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가능성”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현실을 체념하라는 뜻이 아니라, 실현되지 않은 완벽한 가능성을 내세워 실제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다른 선택들이 모두 이루어진 가상의 인생이 아니라, 이미 잘못 선택하고 상처받으며 여기까지 도착한 바로 이 인생뿐이다.
이러한 그녀의 생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녀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어느 부분에서는 억압받았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으며, 제때 이해받거나 도움받지 못했다. 우리에게도 되돌릴 수 없는 선택과 놓쳐버린 가능성,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다. 우리가 누나의 삶을 하나의 실패작으로 판정한다면, 언젠가는 똑같은 기준으로 우리 자신의 생도 실패라고 판정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누나가 실제로 살아낸 불완전한 생을 하나의 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삶이었어야만 가치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생을 완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고통과 기쁨, 억압과 열망을 함께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질문을 과거를 심판하는 질문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보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아니라, “이미 이렇게 살아온 삶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할 것인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