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의 목적

'어떻게' 말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byLanie

요즈음 사람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지만, 그 지식을 토대로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아이는 결국 어떠한 사람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딱히 이야기하거나 잘 질문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육아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려고 하고, 실제로 그 사항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그들이 "무엇을"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애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영아기에 강하고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했을 때, 아이는 어떤 인간이 되는가? 그러니까 도대체 "왜" 우리는 아이가 강하고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도록 해주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안정 애착을 장착한 아이가 보여줄 인생을 받아줄 마음의 준비가 우리는 되어 있는가?




영아기에 아마 부모가 가장 바라는 순간은 아이가 엄마는 있는 둥 마는 둥 하고 혼자서 잘 노는 순간일 것이다.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있는 엄마는 혼자만의 시간을 거의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아이가 혼자 잘 논다 싶으면 이때다, 싶어 자리를 이동하여 엄마의 볼 일을 보고 싶기 마련이다. 그러나 엄마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며 혼자서도 잘 노는 듯싶던 아기는 엄마가 자리를 이동하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놀던 것을 멈추고 다시 엄마에게 와 보채고 징징대기 시작한다. 엄마가 굳이 자리를 이동하지 않더라도 아기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휴대폰이든 바카라이든 들여다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자기가 놀던 것은 뒤로 하고 엄마의 손에서 엄마가 보려 하는 것을 빼앗는다. 엄마는 아기 근처에서 그저 가만히 아기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는 마치 명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극적이지 않은 대상에 대하여 높은 집중력을 요한다. 그러나 현대 슬롯에서 멍 때리는 것을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배워온 우리에게 그 일은 쉽지 않다. 나도 아기의 이러한 특징을 알아차리고, 또 엄마로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활동에 적응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점에서는 존 보울비의 애착 이론은 엄마의 희생이 아닌 엄마의 게으름을 정당화해 주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생후 2년 반이 된 아이는 엄마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엄마 곁을 떠나 오랫동안 방향성을 유지하면서 외부를 탐색할 수 있지만, 일단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면 아이는 이상하게도 무능해진다. (…) 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화를 낸다. (p.385)


엄마의 시선이 머무는 그 공간은 바로 아이가 자신의 '안전기지'로 인식하는 공간이다. 강하고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된 아이들에게는 '안전기지'가 구축된다. 엄마가 바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할수록 아이는 자신의 안전기지를 더 넓힌다. 이 안전기지 속에서는 아이는 아기일 때, 놀잇감이나 주변을 탐색하며 논다. 그러나 아이에게 안전기지가 확보되지 않으면, 그 아이의 과제는 더 이상 놀이나 탐색이 아닌 '안전기지의 확보'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아기는 인생의 시간을 '엄마 붙잡아두기' 과제에 쓸 수도, '주변세계 탐색하기'에 쓸 수도 있다.


엄마가 자기를 내버려 두려고 곧 떠날 것이라고 아이가 의심하게 될 때, 아이는 엄마 곁에 있으려고 상당히 고집을 부린다. 이와 반대로 엄마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엄마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엄마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이가 보게 되면, 아이는 완전한 상태로 더 멀리 탐색을 나가기도 한다. (p.393)


그러니까 애착의 목적은 결코 아이를 엄마에게 묶어두는 데 있지 않다. 아이가 엄마 말을 잘 듣게 하는 데 있지도 않다. 애착의 진정한 목적은 아이가 엄마를 안전기지로 삼아 엄마 밖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애착의 중요성을 아는 부모들이 이 결과에 대한 사실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이 든다.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는 나중에 커서 세상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바탕으로 부모가 모르는 세계를 탐험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모르는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사귈 것이다. 부모가 모르는 세상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때 부모는 아이의 세상을 불안해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린아이가 견고하고, 지지적이고, 협력적인 엄마를 경험하면 (…) 아이는 자기 존재를 가치 있게 느끼고, 타인의 도움에 대해 신뢰하게 되며, 미래의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유리한 기초 모형을 갖게 된다. 그리고 (…) 자신의 환경을 자신감 있게 탐색하고 효과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신의 능력에 대해 또한 더욱 신뢰하게 된다. (…) 인생 또한 적절히 통제되고 복원되는 방식으로 작동되도록 점차적으로 구조를 갖추게 된다. (p.565)


도널드 위니캇은 그의 바카라 <<놀이와 현실>> 마지막 장에서 이 어린 시절의 돌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부모들이 아이가 청소년기가 되었을 때 느낄 수 있을 바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서술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들은 사춘기를 겪을 것이며,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고,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며,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더 좋은 삶과 기회를 질투할지도 모르고(그러나 그것은 바로 부모인 우리가 마련해 준 것이라는 것을 아는 부모와 모르는 부모로 나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마련해 준 것임을 (대부분 모르겠지만) 알든 모르든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애착을 형성해 줌으로써 아이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고, 도널드 위니컷은 이를 "아기의 씨를 심고 폭탄을 추수한다"라고 표현한다.


혼동의 또 하나의 근원은 만약 엄마들과 아빠들이 그들의 아기들과 아이들을 잘 키운다면 말썽이 줄어들 것이라는 그럴듯한 가정이다. 그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이 당신 자손의 인격 성장을 증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결과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일에 성공적이라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가졌던 것보다 인격 발달을 위해 더 좋은 기회들을 갖게 되는 당신 자녀들에 대해서 질투를 느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보상은 간접적으로 온다. 그리고 물론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 그 반역은 당신이 자녀를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도록 키워 줌으로써 그 자녀에게 준 자유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기의 씨를 심고 폭탄을 추수했습니다." (도널드 위니컷, <<놀이와 현실>>, pp. 218-236 中)


피터 센게의 <<학습하는 조직>>에서 그는 리더십에 관하여 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미 2,500여 년 전에 중국의 사상가 노자는 '더없이 훌륭한 설계에서는 지도자와 그가 지닌 리더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유창한 웅변조로 지적한 바 있다.
- 사악한 지도자란 사람들이 욕하는 사람이다.
- 좋은 지도자란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다.
- 위대한 지도자란 사람들이 "우리 스스로 해냈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다. (피터 센게, <<학습하는 조직>> 中)


여기서는 조직의 리더십에 관하여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를 부모 자식의 상황에 대입해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를 부모로, 사람들을 자녀로 치환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사악한 부모란 자식들이 욕하는 부모이다.

좋은 부모란 자식들이 존경하는 부모이다.

위대한 부모란 자식들이 "우리 스스로 해냈어!"라고 말하며, 부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그러한 부모이다.

아이에게 강하고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해주고 있는 부모는 아무래도 "위대한 부모"의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 것이다. 위대한 부모가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이다. 자녀들이 "우리 스스로 해냈어!"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부모의 토대 위에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었음을 내밀하게 알고 속으로 흡족해하는 것이다.




영아기 시기에 "아기가 잘 노네요!" 하는 말은 그저 일상적인 말인 것 같지만, 사실 이는 최고의 칭찬이다. 이는 사실 "엄마가 그동안 아이에게 적절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지속적으로 따뜻하게 돌보아준 결과, 강하고 안정적으로 형성된 애착을 토대로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탐색하네요!"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만 몰래 자랑하자면 우리 아기는 정말 잘 논다. 과장 없이 어딜 가든 최고로 열심히 잘 논다. 그래서 "아기가 잘 노네요!"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그저 웃지만 속으로는 내밀한 육아효능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아이를 키운 데에 있어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대부분(혹은 전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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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월된 우리 아기는 앞장서 산을 오르내리고, 놀이터에서 만난 형들과 개미를 잡고, 아파트 화단에서 모래놀이를 한다.




아이에게 안정감을 구축해 줄 때에 동시에 우리는 우리 속에 아이에 대한 믿음도 함께 구축해두어야 한다. 만약 아이에게는 안정감을 주고자 하면서 우리 속에는 불신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아이가 아기일 적 안정감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 온 바에 대한 결실을 성공적으로 거두지 못하게 된다. 아이는 세상을 안전기지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막상 부모가 세상은 불안전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앞으로 그 아이와 부모 간에 펼쳐질 숱한 갈등은 상상해 보기 어렵지 않다. 애착 육아는 36개월이 지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청소년기의 미성숙을 다 겪고 성인이 될 때에야, 그 미성숙을 부모인 우리가 견뎌낸 후에야 겨우 끝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우리가 지금 이 시기에 (인생을 갈아) 들이고 있는 노력이 비로소 어떠한 결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결실을 알아보는 부모가 되는 것이, 끝이 행복한 부모가 되는 길일 것이다.





*출처 표시가 없는 인용은 모두 존 보울비, <<애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