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보울비의《애착》읽기 (2)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론적 근거와 개인적 경험에 모두 비추어볼 때 나의 답은 “보내도 된다”이다. 다만 이 말은 아무 어린이집에나, 아무 준비 없이, 모든 아이를 보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어린이집을 꼭 보내야 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앞선 글에서 나는 ‘아기는 36개월이 되기까지 엄마가 키워야 안정애착이 형성된다’는 명제가 애착이론의 대중화 과정에서 얼마나 단순하고 폭력적인 문장으로 변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36개월이라는 숫자가 아무 근거 없이 생긴 것 또한 아니긴 하다.
보울비의 관찰에 따르면 생후 2년 9개월이 될 때까지는 엄마가 자신을 두고 떠날 때 불쾌한 감정을 보이는 아이가 많았다. 그러나 만 3세가 지나면 아이들은 대개 일시적인 이별을 더 잘 수용하고 다른 아이들과의 놀이에도 더 잘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이러한 안정감은 제한된 것”이라고 덧붙인다(p.313). 만 4세 6개월 이상이 되면 더 어린아이들에게 전형적인, 엄마에게 매달리는 행동도 뚜렷하게 감소한다고 했다(p.314).
그러니까 약 세 살 전후에 아이의 분리 수용 능력에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전까지 어린이집에 가면 애착이 망가지고, 그 이후에 가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허가증도 아니다. 36개월은 금지선이라기보다 발달의 전환점을 설명하기 위한 대략적인 이정표이다.
보울비가 시설양육의 위험을 매우 심각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묘사한 환경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문제 삼은 환경 내지는 방식은 아이가 엄마 역할을 하는 인물과 보조적 인물들의 보살핌, 그리고 친숙한 환경을 떠나 “수시로 바뀌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낯선 환경에서 양육”되는 방식이다(p.61). 즉, 아이가 한 보모에게 잠시 애착했다가 그 사람을 잃고, 다시 다른 보모에게 애착했다가 또 잃는 경험이 반복되는 환경이다. 문제는 '기관'이거나 '집 밖'이라는 장소 자체가 아니라, 그게 누구든 아이가 믿고 의지할 한 사람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양육자가 계속 바뀌고, 가까워질 만하면 관계가 끊어지는 환경이다. 즉, 중요한 것은 집이냐 어린이집이냐, 혹은 엄마냐 보육교사냐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애착 환경"이다.
보울비가 관찰한 1950년대 병원이나 보육원과 2026년 대한민국 어린이집의 환경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적어도 내가 직접 경험한 어린이집의 교실은 ‘수시로 바뀌는 낯선 사람들이 있는 낯선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2026년부터 0세반 교사 대 아동 비율이 종전 1:3에서 1:2로 개선되고 있으며(게다가 해당 연 1월 1일 기준으로 나이반이 결정되는 것으로, 1월생인 우리 아기는 근 두 돌까지 0세반 비율 기준에 따라 보육받는다.), 내가 경험한 어린이집에서는 교사들은 영아를 두고는 화장실조차 갈 수 없으므로 보조선생님, 원장선생님도 총동원되어 함께 도왔다. 엄마는 주로 집에서 가사도 함께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엄마가 하루 종일 집에 있다고 해서 그 시간 내내 집중해서 아기를 돌볼 수는 없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보다 집중해서 아기와 상호작용을 해줄 수 있는 환경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애착과 영아의 정서적 발달은 보육교사 교육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이며, 아이가 어린이집 교사와 애착을 형성하고 어린이집이라는 공간에 편안해질 때까지 서서히 접근하도록 배려한다. 어린이집에 보낸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떼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접근하면 아이가 감당해야 할 분리의 충격과 불안이 훨씬 커질 수 있다.)
10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우리 아기의 경우, 첫 어린이집에의 적응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첫 1주일 정도는 하루 1시간 정도씩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에서 놀이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부터는 엄마와 함께 있다가 10분, 20분, 30분으로 늘려가며 얼마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세 번째 주가 되어서야 40분, 1시간, 1시간 반... 이렇게 서서히 시간을 늘려가며 원에 적응하였다.
보울비는 연구에서 아이가 엄마와 분리되어도 한 명의 대리모가 더 일관된 양육을 할수록 고통은 줄어들며, 특히 이전에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만난 적이 있는 대리모가 양육할 때, 비탄의 강도는 전체적으로 줄어듦을 보았다(pp.63-64). 즉, 어린이집에서 담임교사가 자주 교체되지 않고 아이의 신호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면, 그 교사는 아이에게 분리의 고통을 완화하는 친숙한 애착인물이 될 수 있다. 이때 담임교사는 반복적인 만남, 민감한 반응, 관계의 지속성을 통해 애착인물이 되는데, 처음 며칠간 엄마가 교실에 함께 있도록 한 방식은, 적어도 관계의 연속성과 친숙함을 중시한 보울비의 설명과 잘 부합했다.
나는 아마도 이러한 교사:원아 비율이나, 세심한 적응 및 애착 형성 프로그램을 미리 알았더라면, 괜히 가슴 아파하지 않고 어린이집 문을 좀 더 일찍 두드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 어린이집에나 보내도 되고, 부모가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 어린이집과 한 교사에게 적응하는 일은 아기에게 중대한 사건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어린이집을 자주 옮기지 않고, 담당교사가 빈번하게 바뀌지 않는 환경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원장의 운영 경력이 안정적이고 장기근속 교사가 있는지도 살펴보는 편이 좋다고 느꼈다.
물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중요하다. 보울비는 안정애착과 관련하여 “엄마와 아이 사이의 상호작용의 양과 성격”을 말했다. 즉, "양"도 중요하다. 다만 양만으로 관계의 질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예컨대 하루 종일 시간을 낼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 별로 반응하지 않거나 세심하지 않은 엄마와,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있을 때마다 강렬하게 상호작용한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는 아이가 엄마보다 아버지와 더 강한 애착을 형성하였다(p.473).
이스라엘 키부츠의 사례는 이 점을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는 문화적으로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동체 보육학교에서 보냈고, 일상적인 양육활동의 상당 부분도 보모가 담당했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일요일을 제외하면 하루 한두 시간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주요 애착인물은 부모였다. 이 장면은 부모가 아이의 일상적 욕구를 충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어떤 안정감과 사랑”을 주었는데, 이는 바로 적극적인 반응과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p.494).
물론 이러한 사례만으로 모든 형태의 장시간 보육이 괜찮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의 총량과 애착의 깊이가 단순한 비례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즉,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엄마와의 안정애착이 손상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원 후에도 아이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충분한 상호작용을 이어간다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여러 매체에서 애착이론을 들먹이며 육아에 대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할 때, 주로 엄마와의 애착문제만 언급될 뿐 다중애착에 대한 내용은 많이 언급되는 것 같지 않다. 다중애착이란 한 아이가 둘 이상의 구별된 인물과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처음에 주위 인물에게 집중한 애착행동을 나타냈던 유아는 다른 구별된 인물들에게도 애착행동을 나타낸다. 따라서 엄마와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맺은 아기는 어린이집에서도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반응해 주는 담임교사와 새로운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아기는 가정에서도 엄마와만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아빠, 조부모, 형제자매들과도 자연스럽게 애착관계를 맺는다. 이때 우리는 어린이집 담임교사에 대해서도 이러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다중애착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어린 유아가 자신의 애착을 많은 인물들에게 퍼뜨려서 어느 한 사람에게 강한 애착을 나타내지 않고서도 잘 살아가며, 그 결과 어떤 사람이 곁에 없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pp.462-463). 즉, 여러 사람과 애착을 형성하더라도 모든 애착관계가 아이에게 똑같은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어린이집 교사와 애착한다고 해서, 주양육자와의 관계가 얕아지는 것이 아니며, 어린이집 교사와 강한 애착을 형성한다고 해서 교사가 엄마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 아기의 경우,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원장선생님, 보조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의 마중은 반기지 않았으며 담임선생님이 나타났을 때에만 두 팔을 벌려 안겨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하원 때 엄마가 데리러 가면 그때는 엄마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엄마에게 다시 달려왔다. 나는 이 장면을 엄마와의 안정 애착에 기반하여 담임교사와도 강한 애착이 형성된 모습으로 보았다.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엄마는 다른 관심을 모두 차단한 채 육아에만 집중하며, 아이가 자면 엄마도 나란히 잠들 수 있는 환경일 것이다. “아기 잘 때 같이 자”라는 말을 참 쉽게들 하는데… 정말 그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러면 아기가 먹을 것은 누가 준비할까? 아이와 외출이라도 하려면 엄마와 아이의 외출준비는 언제 하며, 짐은 언제 챙기고, 또 엉망이 된 집은 누가 치울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이 모든 것을 해 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가사는 아이가 집에 있는 만큼 불어난다. 아이는 끊임없이 흘리고, 쏟고, 토하고, 하필 새 기저귀를 채우는 찰나에 용변을 본다. 그 모든 것을 방지하려면 아이를 한 곳에 가두거나 움직임을 통제해야 할 텐데, 전문가들은 그것 또한 탐색해야 할 시기의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한다.
보울비도 엄마가 마치 진공상태에서 아이만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돌보는 일과 일상적인 가사가 경쟁하고, 남편과 다른 자녀의 요구는 더 대처하기 어려운 갈등을 만든다고 썼다. 그래서 엄마는 “불가피하게 갈등을 경험”하는데(p.366), 여기에 오늘날의 현실을 더해 생각한다면, 엄마에게는 노동과 휴식,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삶 또한 존재하며 필요하다.
내가 체감하기에 저출산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핵가족 문화, 그리고 개인주의화이다. 모든 것은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요즘 며느리들은 이른바 ‘시월드’의 간섭에서 이전 세대보다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나와 내 아이를 돌보아줄 손길에서도 멀어졌다. 또한 늦게 결혼하는 동안 각자의 커리어를 계발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부모님도 나이가 드셨다. 또 오늘날에는 이웃끼리 서로 인사도 않고 지내는 경우도 많으며, 동네에서 사람을 사귀어도 사람들이 어찌나 서로 조심하는지, 조금이라도 민감할만한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지내던 때에는 또 그만한 불편함과 부담이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불편과 부담은 사라진 만큼 이웃과 동네의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한 마디로 시대가 변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일이 요구하는 것, 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아이의 본성이 요구하는 일들은 바뀌지 않았다.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관심과 보호, 돌봄을 요구한다. 그러니 예전에는 대가족이나 온 동네가 나누었을 일을 이제는 엄마 한 사람, 많아야 부부 두 사람이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 상태를 너무 쉽게 ‘엄마가 직접 키우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인류가 언제부터 아이 한 명을 한두 사람이 밀폐된 아파트 안에서 온종일 홀로 키웠을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린이집과, 연구에서 묘사되는 영국의 1950~1960년대, 정말 '불가피하게' 가정에서 돌볼 수 없었던 일부의 아이들만 맡겨졌던 차가운 ‘기관’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어린이집은 우리가 상실한 대가족과 이웃의 구성원 대신해 주며, 그만큼 축소된 아이의 슬롯적 공간을 채우는 곳이다. 엄마가 혼자 만들어줄 수 없는 또래관계와 반복되는 일상, 다른 어른과 신뢰를 쌓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곳일 뿐 아니라, 엄마가 아기와의 상호작용 외 엄마로서의 다른 역할도 함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유아의 성숙과정에 맞춰주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기 때문에, 부모가 그 일을 해내려면 매우 헌신적이어야만 한다. ... 어머니는 이때에 지원 받을 필요가 있다. 어머니는 아동의 아버지(곧 남편), 어머니,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슬롯환경으로부터 지원 받아야 한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반드시 언급될 필요가 있다.
- 도널드 위니캇,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p. 121
물론 이것은 모든 가정과 모든 어린이집에 자동으로 적용되는 공식이 아니다. 또한 나는 어린이집에 보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보육이 자신과 아이에게 잘 맞고,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혹은 그러한 도움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엄마에게 하루치 체력이 세 사람 몫쯤 있거나, 아이가 마치 인생 3회 차라도 되는 듯 세상사를 달관한 것처럼 순한 경우라면),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어린이집의 도움을 받아야 가족 전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또 그렇게 하면 된다.
유독 육아의 장면에서는 아기의 인생이 다 똑같고, 엄마의 인생도 다 똑같다는 가정 하에 왈가왈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인이 자기의 타고난 기질과 자라난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듯, 아기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기질과 성격이 각기 다르고, 거기다가 부모의 성향과의 조합에 따라 육아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실상은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누구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다. 다만 무지했던 과거의 나에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쓰는 글이다. 어린이집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렴풋한 부정적인 인상, 육아 첫 해에 남편과 수시로 싸우다 부부가 동시에 몸살로 앓아누운 뒤에야 두 손 두 발을 들고 어린이집 대기 버튼을 눌렀던 나에게. 교실 안에 직접 들어가 보기 전까지 요즘 영아반의 돌봄이 얼마나 세심하게 이루어지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말이다. 그러면서도 첫 몇 개월 간 아이를 맡기고 돌아올 때마다 죄바카라감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던 나에게. 혹여 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면 뭘 할 수도 없으면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있던 그때의 나에게. 진짜로 뭔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인지 혹은 죄바카라감이나 덜어보려는 심보였는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문제에 대한 웬만한 영상과 정보는 다 찾아 읽어보다가 결국 보울비의 원전까지 펼치게 되었던 나에게 말이다. 그리고 천차만별의 모습 속에서도 혹시 어딘가에 있을 과거의 나와 같은 시간을 걷는 사람에게 말이다.
애착의 목적은 아이를 엄마에게 묶어두는 데 있지 않다. 아이가 엄마를 안전기지로 삼아 엄마 밖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어쩌면 어린이집은 그 세계의 첫 번째 방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집에 있었는가 기관에 있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누구와 지속적이고 강한 관계를 맺었는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36개월 전에 어린이집 보내도 될까?"가 보다는,
"우리 아기가 어디에서 누구와 지속적이고 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로.
지금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