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물학과 유전학이 부순 설계의 환상
오랫동안 인류의 모든 문명은 단 하나의 거대한 믿음 위에 안락한 집을 짓고 살았다. 바로 ‘목적론(Teleology)’이라는 세계관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중세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생명에는 그것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가 깃들어 있다고 확신했다.
비가 내리는 것은 대지의 식물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낮을 밝혀 만물을 따뜻하게 감싸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눈이 얼굴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세상을 보기 위함이며, 심장이 쉼 없이 뛰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정교한 연쇄의 가장 꼭대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 있었다. 자연의 모든 질서와 풍요는 궁극적으로 신이 인간이라는 걸작을 먹이고, 시험하며, 영광스럽게 완성하기 위해 정교하게 안배해 둔 무대 장치라고 믿었던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이 목적론적 믿음을 가장 명쾌하고 강력한 비유로 정리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 유명한 ‘시계공 논증(Watchmaker Analogy)’이다.
풀밭을 걷다가 발에 채인 돌멩이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돌멩이가 왜 거기에 놓여 있는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연의 바람과 비바람에 깎여 우연히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길을 가다 땅바닥에 떨어진 정교한 회중시계를 주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수십 개의 정밀한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고, 태엽의 힘으로 초침과 분침이 정확하게 시간을 가리키는 그 복잡한 기계를 보며 "바람과 먼지가 우연히 뭉쳐서 저절로 시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계의 복잡성과 기능성은 필연적으로 그 배후에 시계를 설계하고 만든 ‘지적인 시계공’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페일리는 이 논리를 생명체로 확장했다. 인간의 눈(Eye) 하나만 들여다보아도 그렇다. 빛의 양을 조절하는 홍채, 초점을 맞추는 수정체, 상을 맺는 망막과 이를 뇌로 전달하는 시신경의 배치는 시계보다 수천 배는 더 정교하고 경이롭다. 그렇다면 이토록 완벽한 생명의 기계 배후에는, 시계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지전능하고 지혜로운 ‘우주적 설계자’, 즉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페일리의 시계공 논증은 종교가 쥔 가장 막강한 무기였다. 인간의 직관과 상식에 완벽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결과물 뒤에는 반드시 그것을 의도한 지적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 그리고 인간이라는 생명은 그 원인의 가장 거룩하고 특별한 목적지라는 확신. 종교는 이 단단한 목적론 위에서 인간을 '창조 드라마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군림시켰다.
그러나 1859년, 영국의 한 박물학자가 펴낸 한 권의 바카라이 이 직관적인 상식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었다.
다윈이 인류 지성사에 가한 진정한 충격은 흔히 대중이 오해하듯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다"라는 단순한 혈통의 폭로에 있지 않았다. 아직도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진화론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자신의 지적 게으름에 대해 반성을 넘어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다윈이 증명해 낸 진짜 비밀은 훨씬 더 냉철하고 파괴적이었다.
"생명의 눈부신 정교함과 복잡성은 지적인 설계자의 의도나 목적 없이도, 오직 '무작위적 변이'와 '환경의 자연선택'이라는 자연법칙의 과정만으로 저절로 탄생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생명이 진화하는 방식을 아주 단순한 세 단계로 쪼개어 살펴보자.
첫째, 변이(Variation)의 발생이다. 생명체가 번식할 때, 부모의 유전 정보는 자식에게 완벽하게 복사되지 않는다. 복사 과정에서 늘 무작위적인 오타와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이것은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을 띠지 않는다. 키가 조금 더 큰 개체가 태어나기도 하고, 털이 조금 더 촘촘한 개체가 태어나기도 하며, 날개 색깔이 조금 짙은 개체가 태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우연의 주사위'다.
둘째, 가혹한 생존 투쟁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다. 환경은 모든 자식을 다 먹여 살릴 만큼 넉넉하지 않다. 추위, 가뭄, 포식자, 먹이 부족이라는 가혹한 시험대가 늘 펼쳐진다. 이때 우연히 추위를 잘 견디는 촘촘한 털을 가지고 태어난 개체는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확률이 높아지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어 사라진다. 자연이 특정한 형질을 '선택'하는 것이다.
셋째, 시간의 누적(Accumulation)이다. 이 무작위적인 변이와 환경의 선택이 수백 년, 수만 년, 그리고 수억 년이라는 아득한 ‘깊은 시간(Deep Time)’ 동안 쉼 없이 반복된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생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던 미세한 우연의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태양 빛의 유무만을 겨우 감지하던 원시적인 감광 세포(빛을 느끼는 점)가 우연히 오목하게 패이며 방향을 감지하게 되었고, 그 구멍 위에 투명한 체액이 차오르며 렌즈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카메라처럼 완벽한 눈으로 다듬어졌다.
하나님이 도면을 펼쳐놓고 "인간에게 시각을 주어야겠다"며 눈을 조립한 것이 아니다. 목적도 없고 마음도 없는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성공적인 변이들을 체로 걸러내며 다듬어낸 거대한 누적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통찰했듯,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눈도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으며, 어떤 거룩한 목적도 품지 않은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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