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가 있다.
내가 만들고서 내가 들어가 갇히는 박스.
‘그러니까 이제 어쩌지?’
그날 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늘 그랬다. 다가오면 동시에 도망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상대가 소중하게 느껴질수록 더욱, 중요함이 더해질수록 더 간절히. 강력한 의미부여와 함께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관성대로 마음은 다시 박스를 가져왔고, 생각은 벽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끝을 맺었다. 누군가가 삶에 들어온다는 건 아프고 못난 부분까지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완벽주의는 취약함을 감추기 위한 도구였다.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서둘러 박스를 세우고 안에 들어가 숨었다. 약간의 고통과 답답함이 느껴져도 상자 안은 편하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인다. 혼자가 되자 아무도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이 다시 드리워진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감당할 수 없으니 덮어낸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이번에도 이렇게 넘기면 된다. 그렇게 넘어갈 것이다.
기억을 못 하는지, 모른 척하는 건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박스 안에 있어도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가을 공연을 끝으로 고시 공부에 돌입하려던 계획이 불가능이 된 듯 보였다. 다들 고시는 장기전이니 무리하지 말라 했지만, 그건 속 편한 그들 사정이다. 나는 빨리 무언가 이루고 싶어 악착스러운 조바심이 났다.
‘이럴 바엔 군대를 가버리자.’
가능성을 없애는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서서히 옅어지다 드문드문해지다 점점 사라져 갔다. 군에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계발서나 합격수기집을 읽었다. 9.11 사건도, 한일월드컵도 내겐 별다른 기억이 없다.
2002년 겨울, 제대하자마자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목표는 다가오는 2월 1차 시험 합격이었다. 절대적인 시간은 부족했지만 갓 제대한 군인의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채웠다.
하지만 늘 그렇지.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
시험을 하루 앞둔 날.
2003년 2월 22일, 오후 1시
오늘 시험장 동선 최종 확인. 오전 자습 마무리. 점심은 가볍게 편의점으로.
그게 전부였어야 했다. 적어도 내 계획으로는.
"어? 준석. 맞지?"
그녀가 먼저 알아보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피하려던 걸음이 그 자리에 섰다. 그녀를 본 순간 알았다. 내가 아주 많이 그리워하던 얼굴이라는 걸.
바람이 불어 우리 사이를 스쳤다. 그녀는 작은 어깨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창백할 만치 하얀 피부는 그대로였다. 추위 때문인지 두 뺨과 코끝에 핑크빛 기운이 돌았다. 예전보다 말랐지만 씩씩해 보였고, 피곤함 섞인 얼굴에도 생기가 피어났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어 그녀의 잔머리가 흩날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흑발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흐린 날씨가 하나도 흐리지 않았다. 추운 날씨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앞에 선 그녀가 모든 걸 가렸다. 마비시켜 버렸다.
"아, 지홍 선배...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녀는 마치 어제 만난 사람인 듯 다가서며 물었다.
"군대 갔다고 들었는데, 전역한 거야? 점심은 먹었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는 스타일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차분하고 천천한 말투는 거부감 없이 스며들어 상대의 마음을 연다.
"아, 네. 작년 11월에 나왔어요. 점심은 아직인데... 여기서 먹으려고요."
나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심히 뒤쪽 편의점으로 시선을 보냈다.
"잘됐다. 나도 아직인데, 같이 먹을래?"
번뜩 정신이 든다.
"아, 그게... 제가 내일 1차 시험이라서요. 최대한 조용히 보내려고 하거든요. 시험 끝난 후에 한 번 보시죠."
떨쳐내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맞다. 내일 시험이네. 하지만 시험 전날이면 편의점보다 든든한 게 나을 텐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내 앞에 더 가까이 섰다. 순간 나는 도톰한 패딩에 그녀가 팔짱을 끼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널 보니 반가워서 그래. 그리고 이건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오늘 내 생일이거든. 꼭 같이 먹고 싶은데, 정말 안될까?"
"그래도 오늘은 좀..."
어정쩡한 태도를 놓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 에이, 가자. 저기 쌀국숫집 보이지? 저기 무지 맛있어. 어차피 점심은 먹어야 하잖아.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었나. 의외로 굽히지 않는 모습이 당황스럽다. 한편으론 내심 쌀국수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베트남 식당에 가보지 못했다. 한창 포베이, 포메인 같은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지만 고시 식당도 싼 곳 위주로 다니는 고시생에게, 세련된 간판에 노란 벽지, 테이블마다 조명이 달린 음식점은 사치였다.
'어차피 이대로 헤어져도 찜찜할 텐데, 에이 모르겠다.'
멍청한 나는 그녀를 따라 쌀국숫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그녀는 올해부터 신림동 고시촌에 와 있다고 했다. 작년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올해 6월에 2차 시험을 본다고도 했다. 역시 그녀답다. 안 하는 것처럼 해도 할 건 다 하고 있다. 아마도 오피스텔을 구했거나 깨끗한 원룸 3층쯤에 살고 있겠지. 독서실도 좋은 곳에 다닐 테고. 나는 반지하도 못 구해서 옆 방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고시원인데…
"이거 네 거야? 잠깐 봐도 돼?"
생각에 잠긴 사이 그녀가 내 앞에 놓인 휴대폰을 보며 물었다.
“아… 예.’
그녀가 건네받은 폰의 버튼을 정성스레 꾹꾹 누른다. 잠시 후 그녀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가 꺼졌다.
"내 번호."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 지을 때, 다행히 쌀국수가 나왔다. 눈치 없이 붉어진 얼굴이 티 날까 고개를 푹 숙였다.
ㅂ쌀국수는 아주 맛있었다.
"예? 봉사활동이요? 선배, 고시생 아니에요?"
먹다가 나도 모르게 놀란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식사 후 바로 뭐라 뭐라는 부모님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시설에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그릇에 젓가락을 넣고 한번 휘저었다.
"봉사를 할 땐 나에 대해 잊어서 좋아."
휘저은 쌀국수를 먹으며 생각에 잠긴 듯 그녀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탈을 하면 자유라 생각했어. 하지만 이상하지? 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자유를 느꼈어. 벗어나고 도망쳐 내 맘대로 사는 게 자유가 아니었어. 자유는 나를 통해 웃는 사람들 표정 속에 있었어. 내 앞에 누군가가 행복한 모습을 볼 때,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지더라. 그러고 보면 나에 갇혀,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때 나는 한없이 무거워졌던 거 같아."
"글쎄요. 솔직히 저는 운동하는 시간도 아깝던데요.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보는 게 낫지... 사실 저는 합격 말고는 관심 없어요. 봉사는 고사하고 지금은 친구도 여행도 다 사치 같아요."
나는 왠지 오기가 생겼고,
그녀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서렸다.
"... 그저 누릴 자격이 없다는 믿음 아닐까?"
누릴 자격 없다는 믿음...
뜬금없이 꽂히는 말이다.
"포근한 이불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새로운 곳에서 맞이하는 여유 있는 아침은 누구라도 좋아할 거야. 누리기를 피하는 사람은 핑계가 많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된다. 심지어 자기 몸을 아프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돼. 아무튼, 고시는 장기전이잖아. 하루이틀 밤새서 될 일이 아닌데."
"저는 최대한 빨리 끝내려고요."
"평균 합격 나이가 얼마인지 알지? 넌 아직 어리잖아.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꿈 깨라는 거예요? 평균 합격 나이가 왜 나와요? 그게 중요한가요? 전 평범하지 않아요. 그게 내일 시험 볼 사람한테 할 이야기예요? 경험자면 시험 팁이나 이야기해 주면 되지, 이런 이야기 되게 재미없네요."
"지금을 인정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야. 너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존중이 빠져있어. 현재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냐. 싸워야 할 대상도 아냐. 반드시 해내야 하는 생존게임이 아니라고. 존재하며 숨 쉬고 있잖아, 감사하게도, 살고 있잖아. 지금을 부족한 아이 취급하지 마. 마이너스가 아니라 온전한 제로부터 나아가는 게임이라고. 이게 시험 팁이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내일도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보지 말고, 길은 이것뿐이 아니란 마음으로 봤으면 해. 준석이 넌 욕심이 너무 많아. 당장 뭔가를 이루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리느라 들어갈 틈이 없지. 경직을 풀고 여유를 가져보면 더 많은 것이 보일 텐데."
위로인지 충고인지 모르겠다. 아니, 이건 나를 무시하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평범하게 보여?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내가 누군데. 나는 아니야.
"선배처럼 속 편하고 살만한 사람은 이 시험이 되든 안 되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겠지만, 저에겐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다 먹었으니 먼저 일어설게요.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자기 앞에 남은 음식들을 빤히 보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그러고서 천천히 말했다.
"너를 만나 참 반가웠어. 오늘 네가 하려고 했던 일 망치지 않길 바라."
잠시 멈춘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본다.
"2000년 공연 뒤풀이 날 기억해? 잊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날은... 몇 안 되는... 손에 꼽는 행복한 기억이야. 고마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눈가에는 물기가 핑 하고 차오른다. 그녀는 무언가를 더 이야기하려고 입을 오물거리다 체념한 듯 웃으며 가는 손을 흔들었다.
등을 보이고 똑바로 걸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래, 수없이 생각해 봤잖아. 어차피 맞지 않는 사람이다. 시작하더라도 헤어져야 한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나? 그렇게 힘들게 잊었는데 괜한 미련을 가지려는 내가 바보 같다. 정신 차리자. 설사 마지막이라도 상관없다. 언제가 치를 일이라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