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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홍.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남자 친구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 어머니는 어느 대학 교수, 오빠는 사법시험과 법원행시를 모두 패스한 고시 2관왕이라나 뭐라나. 그녀는 그 시절 모두가 알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몰랐다. 그 흔한 귀걸이나 목걸이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낮은 신을 신었으며 팔목에는 실로 꼬은 검은색 끈을 차고 다녔다. 그녀의 옷은 대부분 회색이나 흰색이었다. 가끔 티셔츠 위로 보이는 도드라진 쇄골 오른쪽으로는 언뜻언뜻 보이는 작은 문신이 있었다.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을 아는가? 그때 대본 연습이 한창이던 여름 어느 날. 그녀가 동아리방에 들어왔을 때가 그랬다. 그녀는 하늘색 반바지에 연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니 하얀색 셔츠에 연분홍색 무늬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분명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모두의 시간이 일시에 정지했을 것이다. 그때, 빛이 함께 들어왔으니까…. 플랫슈즈를 신은 가느다란 다리, 매끈한 팔, 가볍게 날리는 버건디빛 머리카락과 하얀 이마, 어깨에 걸쳐진 베이지색 에코백까지... 모든 게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내가 그녀를 좋아한 건 아니다.
그 후로 며칠 뒤 학관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갑자기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멈칫한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지홍은 계단 위에 서있는 나를 몇 초간 그대로 빤히 보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뿜고서 그녀의 하늘을 응시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가 여리고 순수한 투명함을 담배와 문신과 거친 말투로 가리려 했다면, 나는 복잡한 본성과 검은 결핍을 바른 이미지와 선해 보이는 얼굴에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쾌활하고 가벼운 모습 한편으로 쓸쓸하고도 침착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나는 성실하고 말이 없었으나 속에는 남모를 분노와 불안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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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공연이 끝나고 뒤풀이가 있던 밤. 하나둘 취해 흩어지고 몇 명 보이지 않았을 때 정신을 차리려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곳에 벤치가 보였다. 걸터앉아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나를 본 그녀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옆에 앉은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너 오늘 정말 잘하더라. 미친놈처럼."
그녀가 살짝 웅크려 구부린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하하 고맙습니다, 선배."
취기 때문인지 대답이 바로 나왔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씩씩하게 웃는 내가 신기하다는 듯 옆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종알거리는 아기새 같다.
"정말 배역 말고는 김준석이 보이지 않더라고. 이상하게도 그게 진짜라고 느꼈어. 김준석이라는 사람이 없는 게 진짜라는 생각. 그 순간 무대 밖은 모두 잊었던 것 같아. 뭐랄까. 평온하면서도 고요한 기분이었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 네. 저도 잠깐 정신이 나갔었는지, 하고 나니 얼떨떨하더라고요. 끝나니 아쉽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가 봐. 공연 후에는 다들 엄청 취하거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말을 이었다.
"너 왜 우리 동아리 이름이 '부기'인 줄 알지?"
"네, 거북이의 부기라고 하던데요?"
"응 맞아. 나는 나비하고 거북을 좋아해. 나비는 애벌레 출신이라 좋고. 거북은 느려서 좋아. 나, 그래서 여기 들어왔어. 연기는 쥐뿔도 못 하면서. 그냥 이름이 좋아서."
"아, 예 뭐 저보다 낫네요. 저는 정말 얼떨결에 들어왔어요. 연극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신이 난 듯 보이던 지홍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런 기분 알아? 태어났는데 출발선이 아니라 이미 출발선 위쪽에 있는 거야. 잘한다. 잘한다. 하고, 부러울 게 없겠다고도 하고, 특권을 가졌다고 하는데 난 원한적 없거든.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소란도 많고, 소음도 많지. 그러니까 그런 게임은 공정하지 않잖아. 나는 그냥 뛰고 싶을 뿐인데. 거북이는 안 그렇잖아. 출발선부터 성실히 묵묵히 자기 숨소리를 듣고 나아가지. 너를 보면... 거북이 같아. 굳이 세분화하자면 욕심 많은 거북이?"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그런 거라면 저는 거북이 별로인데요. 제가 노력파도 좀 아닌 거 같고요. 것보다 재능 있다거나 천재란 소리가 듣기 좋고, 기왕이면 처음부터 잘살면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자아가 참 강한 사람이지. 내내 모범생으로 살며 세상 눈치, 남들 눈치, 좋은 성적, 착한 성격... 뭐라도 할라치면 자신에게조차 변명과 합리화를 해야 하는... 내가 나를 인정 못 해서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는."
내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생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이 줄곧 앞으로만 향하고 있어 잘 안 들리는지도 몰랐다. 내 쪽을 봤으면 했지만 이게 더 나은 것도 같다. 그녀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너 내가 과 선배인 건 알고 있었어? 3학년이 되도록 동아리 활동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보기엔 좀 안 좋지?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떠밀려 왔지만 난 법이 싫은데... 나는 네가 부러워. 넌 연극도 좋아하지만, 법도 좋아하는 것 같거든. 얼떨결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모두 네가 선택한 거잖아. 아닌 걸 알면서도 강요로 사는 건 참 괴로운 일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술기운을 못 이기고 그대로 내 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혼미한 향기가 무릎 위로 떨궈졌다. 둔탁한 허벅지에서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린다. 당황하여 떨궈진 눈이 그녀의 나비에 닿았다. 쇄골에 앉은 날개 접힌 나비가 그녀와 함께 숨을 쉰다. 나비 아래로 하얀 골짜기가 봉곳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뭇대는 손가락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름다움이란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순간 가녀린 팔이 내 목을 감쌌고, 몸을 돌린 그녀가 밀착되듯 안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굳은 몸이 한꺼번에 녹아버렸다. 부서질 듯한 품이 커다랗게 확장되어 솜사탕처럼 사이사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의 중간 같은 형태로 내 몸 곳곳을 감쌌다. 아찔함에 이끌려 춤을 추듯 입을 맞췄다.
그녀를 느끼고 있었으나 그 몸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황홀함을 느끼는 존재. 아니, 황홀함 그 자체. 아니,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대로의 무엇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나를 스쳤던 그녀의 팔과, 하얗고 동그랗고, 선명한 듯 흐릿한 느낌을 수없이 떠올리며 되새겼다. 그것은 그러기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