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갈증 #1

by지레인


새는

날개를 접으며 허공으로 미끄러진다.
퍼드득 퍼드득 날갯짓 멈추자 비로소,
하늘이 이동해 그를 움직였다.



프롤로그 — 편지


2009년 2월 22일 스물아홉
종종 비슷한 꿈에 시달려. 꿈에서 나는 무대에 섰는데 대본을 외우지 못하거나,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가 전혀 안 됐거나 했어. 내달리는 마음과 달리 몸은 굼떴지. 도서관에 가면 자린 많은데 내 자리는 없었어. 멀쩡한 화장실은 칸칸이 더러워 쓸 수 없었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서 멈출까. 애처로운 의지는 홀린 듯 멍하고, 무심한 시간은 저 혼자 흘러가.
우유 갈증이야. 우유 갈증이 났어. 아무리 해도 부족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어. 과거로 미래로 쏟아지는 생각들로 몸은 여기지만 나는 여기 없었어. 마시고 또 마시면 언젠가... 뽀얀 우유가 나를 채우겠지. 물은 싫어. 너무 투명해. 평범한 물로는 증명 못하지. '내가 여기 있다고. 나 김준석, 이렇게 살다 죽지 않는다고.'

2025년 2월 22일 마흔다섯
겨울을 좋아하게 됐어. 탁한 눈 감으면 청명한 공기! 돌아보는 슬픔은 그 속에 있을 때만큼 아프지 않더라.
작은 나는 그대로야. 사라지지 않았지. 적당히 불안하고 적당히 화가 나고, 한 번씩은 크게 요동쳐 파국으로 치닫다가,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은 괴물이 되는 거야.

달라진 게 있다면, 받아들이게 됐어. 뭐라 할까... 지금은 자신이 괴물임을 아는 괴물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기도 당연히 쉽지 않았어.
불 켜지 않은 방. 어둡고 고독한 공간, 마주할 수 없던 고요를 허용해. 맘에 안 드는 나, 다짐해도 안 되는 나를 억지로 도망쳐 외면하지 않아. 몇 번이고 휘젓던 물웅덩이를 가만히. 마침내 가만히...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서서히 드러나는 빛.
잊고 살아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 침잠하다 녹초가 되어 저항할 힘조차 없는 날. 무겁고 버거워 놓아 버린 시간, 그것은 바닥에 닿는 순간 더욱 찬란히, 어김없이 스며들어 무너진 나를 구원하지.
네가 보고 싶다.
그래. 아무래도 오늘은 25년간 나를 다독여 온 은밀한 사건을 털어놔야겠어. 그날 이후 비슷한 꿈을 꾸지 않아.


1막
2000년 3월
어린아이 같기도, 성숙한 여인 같기도 했다.
돌아보면 고작 스무 살 나와 스물셋 그녀 이야기.
하지만 그때 우린, 참 진지했지.

토요일 아침. 이메일이 와 있다. 크로아티아를 여행 중인 룸메이트 P가 보낸 것이다.
'쳇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유럽 여행이라니, 우리 부모님은 오십 평생 비행기 한 번 못 타보셨는데....'
그래도 고향에선 날고 긴다고 했는데, 여기 오니 잘난 놈 천지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와 만끽하던 기분도 잠시, 내가 그렇게 당당할 처지가 못 됨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차라리 잘된 거지. 어차피 법학과를 선택할 때부터 내 목표는 오로지 사법시험 합격이었다. 열심히 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메일에 사진이 첨부돼 있다. 무심히 열었다. 별이 박힌 남색 하늘 밑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인다. 늦은 밤 광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P 뒤로 사람들이 춤을 춘다. 광장 옆 식당 점원도, 백팩을 멘 청년도, 구경하던 아이와 아이 엄마도 거리 연주자와 함께 즐기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춤추게 하는 걸까?'
낯선 풍경이 만든 균열 사이로 익숙한 풍경이 겹친다. 내가 살던 시골 고향집 근처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는 누가 만든 지 모를 평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늘 동네 어르신이 서너 분 앉아 계셨다. 음식을 나눠먹고,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부른다. 어떤 날은 노랫가락에 맞춰 춤사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약속도 없고 특별한 이유도 없다. 인류는 그렇게 계획에 없던 춤을 어울려 춘다.
'무엇이 인생을 춤추게 할까?'
생각 없이 생각하다 순간 정신이 든다. 아침부터 한심하게 남 사진이나 쳐다보고 있다니. 메일하나 보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그렇지. 나는 한가한 저들과 다르다. 나는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니까.


*
바카라을 펼쳤지만 유독 집중이 안 되는 날이다. 오전 내내 같은 페이지를 끼적이다 점심을 먹고 기숙사를 나왔다. 캠퍼스를 걷다 닿은 곳이 학생회관 앞이었다. 강의 없는 주말이지만 드문드문 학생들이 보인다. 미로 같은 계단과 군데군데 벗겨진 시멘트벽에는 각종 대자보와 포스터들이 규칙 없이 붙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인생 허비와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내가 어떻게 뜬금없이 연극 동아리에 들어갈 생각을 했는지...
가끔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 내가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지곤 한다. 하긴 과거의 나라는 것도 어차피 기억 속 이미지일 뿐이겠지만… 어쨌든 그냥, 안에서 새어 나오는 깔깔 소리를 듣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돌렸던 것 같다. 손잡이 위쪽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연극 동아리 <부기> 신입생모집’
문이 열리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공간,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에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듯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인도 아니고, 특별한 꾸밈도 없었지만 특이한 머리색 때문인지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눈코입이 화려하진 않지만 조목조목 조화로운 얼굴, 남자들끼리는 한눈에 알아보는 예쁜 여자. 숨이 멎을 것 같진 않았다. 이상형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순간적으로 일제히 내게 와 꽂힌 시선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진 하얀 얼굴에 눈동자가 고정됐을 뿐이다. 차가운 인상의 그녀가 하필 웃고 있던 바람에, 하필이면 그때가 처음 본 순간이어서 지금도 나는 그녀를 떠올릴 때면 환한 웃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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