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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지우?... 지.. 지우다."
“지우야. 지우야!”
웅얼거리다... 부르다... 부르짖는다.
저절로 불리는 이름을 부르며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이름이 김성철이라는 것과 나로서 알던 모든 것들이… 중첩된 기억이 한꺼번에 심기며 순식간에 남자는 익숙한 '나'가 된다.
"지우야, 지우 맞지? 아빠야."
애타는 목소리가 조개껍데기 너머 아들을 찾는다.
"우리 지우, 지금 어디야? 집이야? 아니, 아니지..."
성철은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것보다 먼저 물어볼 게 있어. 지금이... 언제지? 오늘이 몇 월 며칠이야?"
"응, 아빠. 오늘이 몇 월 며칠이냐고 묻는 거야?"
되돌아온 목소리는 분명 아들의 목소리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곧 스무 살이 될 아들의 목소리라기엔, 어딘가 앳되고 어리다.
"어... 우리 아들이... 몇 살이더라?"
성철은 조바심이 났다.
"아빠 오늘 생일이잖아. 지우는 여덟 살, 아빠는 사십삼! 아까 케이크도 먹었으면서 그것도 몰라요?"
"응. 그랬구나. 생일이었구나."
여덟 살, 사십삼이라는 숫자를 되짚어보니 10년 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마저 다른 곳에 있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 와서 뭐가 대수인가 싶었다. 그보다 오랜만에 듣는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성철의 가슴을 더 아리게 했다.
그랬다. 어릴 적 지우는 당당하고 밝은 아이였다. 무엇이 그 고운 빛을 덮어버린 걸까. 언제부터 아이는 수많은 말들을 지워가며 혼자이고 싶어 했을까. 어두워 보이던 모습도 그저 커가는 과정이라 여겼다. 사는 게 바빴다. 조용히 사춘기를 지나는 듯한 아들에게, 성철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아빠, 그거 알아? 아까 아빠가 촛불 불 때 나도 소원 빌었는데, 어떤 소원 빌었게요?"
지우는 신이 났는지 종알거렸다.
"어떤 소원 빌었는데?”
“어떤 소원이냐면, 아빠가 얼른 소설을 끝내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소설 다 쓰면 서울랜드 놀러 갈 거라고 했잖아. 이번엔 약속 꼭 지키기예요!”
끝이란 단어와 놀러 가자는 말이 가슴에 얹힌다. 성철은 말을 잇지 못한다.
“근데 아빠, 지금 이거 꿈이야? 아빠 꿈 아니면, 내 꿈. 둘 중 하나겠지?”
“응? 지우야. 다시 말해봐. 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아빠는 지금 바카라상에서 자고 있는데, 조개껍데기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리잖아. 근데 이거 어디서 난 거예요? 어, 잠깐만, 여기서 반짝반짝 빛도 나! 정말 신기해!"
“뭐라고? 정말이야?? 아빠가 지금 네 옆에 있다고?”
흥분된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는다.
“응 목소리는 여기서 들리는데 계속 자고 있어.”
“응. 알겠어. 그럼 아빠 좀 깨워볼래?”
어쩌면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지우가 있는 저쪽으로.
“아까부터 계속 깨웠어.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
"안되면 흔들지 말고 막 때려봐. 아, 아니다. 물! 그래, 부엌에 물 있지? 물을 얼굴에 확 끼얹어볼래? 어떻게든 깨워! 깨워야 해. 지우야!"
"아빠, 왜 그래? 화났어? 제가 또 뭐 잘못한 거예요?"
울먹임을 듣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소용없음을.
들숨과 날숨이 몇 차례 지나갔다.
성철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아니야 지우야.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이라고 자꾸 혼낸 거 거의 다 아빠가... 몰라서 그런 거야. 미안해. 지우야. 사랑할 줄 몰라서 미안해. 아빠는 정말 푹 잠이 들어버린 것 같네. 너무 깊이 잠들었나 봐. 미안해.."
어쩌면 이쪽이 현실이고 저쪽이 꿈인지도 모른다. 그래, 아무려면 어떤가. 남은 시간을 살려고 발버둥 치다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지금 여기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설사 꿈이라도 지우는 희미한 미래에 있지 않다. 분명한 지금, 여기 있다. 성철은 눈을 감았다.
"지우야, 아빠는 지금 지우 목소리가 아주 잘 들리거든. 어때? 지우도 아빠 말 들려?”
“응 잘 들려.”
“잘 들려도 더 가까이 와... 우리 아들. 아빠가 너무 사랑해.”
“히히. 나도 사랑해!”
아들의 목소리가 모래알처럼 반짝인다.
"아빠는 그대로야. 바카라상에 누워있는 43살 아빠도 어쩌면 미래에 있는 53살 아빠도, 회사 다니는 아빠도, 소설 쓰는 아빠도... 아빠는 다 아빠잖아. 그때도 사랑하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해. 변치 않는 아빠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해."
어느 순간의 나가 진짜 나일까? 다만 확실한 건 그 모든 내가 지금 이 순간으로 모아져 있다는 것.
“아빠, 스트레스받지 마요. 소설 쓰고 있었던 거 맞죠? 방해하지 말고 빨리 자라고 했잖아요. 나 잠이 안 와. 방해 안 할게요. 내가 글 쓰는 거 도와줄게.”
목이 메어 말도 못 하는 어른을 태연한 아이가 위로한다.
“일단, 주인공이 겁이 많아?”
“응 겁이 많아.”
성철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잡아 눌렀다.
“그러면 용기를 갖게 모험을 떠나야겠네.”
“그래. 좋은 아이디어다. 근데 모험에서 못 돌아오면 어쩌지? 주인공이 죽을 운명이면 어떻게 해?”
“운명에 맞서는 게 운명이라고 해. 아빠가 쓰는 소설이니까 주인공이 집에 돌아오는 걸로 쓰면 되지.”
“아, 그러면 좋겠다.”
기운이 나며 동시에 힘이 빠진다.
슬프지만 차분하다.
이제 정말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있잖아. 지우야. 아빠 얘기 좀 들어줄래? 아빠 소설 마지막은 우리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야.”
정말로 그동안 못했던 말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모두가 다 하는 말로 하고 싶지 않다. 남은 가족을 위해 무언가 남기고 싶다. 이제야... 당신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됐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시간이 없다. 무슨 말이든 어서 해야 한다.
"아직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음 그러니까 말이지... 살다 보면... 아픔이 찍어 덮치는 날이 있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다가 모든 게 다 세상 탓 같고, 그냥 살아갈 자신이 없는 날. 하지만 지우야. 그런 날도 지나가. 지나갈 것을 믿지 마.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을 믿지 말고 그대로인 너를 믿어. 너는 그것보다 큰 존재거든."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말이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성철은 조개껍데기 저쪽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냈다.
"다시 떨리는 순간이 오고 숨 막히고 가슴 두근거려도 그렇게 지나가고 또 괜찮아질 거야. 남몰래 우는 날이 있을 거야. 창피해도 참지 못해 남 앞에서 울음 터지는 날도 있을 거야. 계속해서 차올라. 닦아도 닦아도 그러다가 따뜻해지는... 그런 날들이 있어."
쏟아붓듯 말하던 성철은 잠시 멈췄다가 이내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그래, 지우야. 그런 날이 너를 성장시킬 거야."
알아듣기는 했을까? 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다.
"응 아빠가 맨날 그랬잖아요. 어려워도 싫어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아빠는 공부도, 숙제도 '싫어요' 먼저 하지 말고 ’네‘ 먼저 하라는 거잖아. 어차피 해야 하는데 싫다고 하면 더 싫어진다고... 맞지? 아빠만 걱정하는 거지 난 이미 그러고 있는데?"
“그래, 우리 아들 잘하고 있네. 맞아. 지우야.”
그러기로 했지. 작은 내가 헤아릴 수 없을 뿐, 삶은 아무 문제 없이 온전하므로, 저항은 더 아프게 할 뿐이므로. 삶에 예스, 어떤 상황에서도. 예스.
"근데 아빠, 그래도 안되면 벨 누르고 도와달라고 하면 되는 거죠? 지난번에 지하철 갈아탈 때 아빠가 알려줬잖아. 안되면 맨 끝에 가서 벨 누르고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고."
"응 맞아. 벨을 누르면 저쪽에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어볼 거야. "
그럴 때
"네."
하고 대답하면
"문을 밀어 보세요."
할 거야. 그리고 그 문을 밀면,
닫힌 줄 알았던 개찰구가 쓱 하고 열려.
그 순간 성철에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문이 있었지만 열어보지 않았다!'
성철은 다짐하듯 말했다.
“잘 들어. 지우야. 만약에 말이야. 해피엔딩이 아니라 주인공이 죽어도 아빠는 괜찮아. 여기 지우가 남아있으니. 우리 아들 말대로, ’네‘라고 대답하고 받아들일 거야. 지금도 봐, 할 말을 다 했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남잖아? 아빠는 이제 정말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거 같아?”
“응 괜찮아.”
“응!”
해맑은 아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음, 지우야…. 아빠가 여기서 또 할 일이 있어서 이제 지우랑은 바이바이 해야겠다.”
“아 또 할 일이 있구나. 응 알겠어. 다음에 만나요. 빠이빠이.”
가슴이 찢기지만 성철은 힘을 낸다. 밝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응. 그래, 엄마 말 잘 듣고, 지우가 엄마를 잘 도와주고 보호해 줘야 해 알았지? 안녕…. 고마워. 우리 아들 사랑해. 사랑해. 지우야.”
"응 아빠 사랑해요!"
아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성철은 조개껍데기를 든 채 다시 홀로 남겨졌다.
어설프게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말이라면, 온전한 것이었으면 했다. 그래, 이것이 끝이라 해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더 힘들고 아플 수도 있었다. 더 갑작스러울 수도 있었다. 이런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무언가를 크게 이루거나 대단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지혜로운 아내를 만났고, 선물처럼 찾아와 준 아이 지우가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었다. 늘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며 살아왔던 남자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다독여주고 싶어졌다.
'수고했다. 김성철, 인생 잘 살았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심장에서 아직도 힘이 느껴져. 떨리고는 있지만 몸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걸. 차가워지지도 않았지. 오히려 땀이 나잖아. 감각이 이렇게 생생한데, 그래. 아직은 아닌 거야. 언젠가 그 순간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노인이 괜찮을 거라 했잖아. 나이 든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어. 나는…. 이 소설을 끝내지 않을래. 소설에서 죽음은 너무 흔하잖아?'
아직 열어보지 않은 문이 남아 있다. 성철은 조개껍데기를 들고 전화 부스를 나왔다. ‘자비‘의 몸에는 남은 시간이, 하나씩 꺼져가며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