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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을 뛰었다.
이제 손목의 숫자는 ‘33’. 벨소리가 멈추기 전 서둘러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야 한다.
'어디야, 어디냐고!!.'
휘젓듯이 달리다 숨이 차 멈췄을 때 문득 하나의 장면이 스쳤다. 빈 상점. 거기서 전화부스를 봤다. 그토록 찾아 헤맨 곳이 처음 눈떴던 장소라니… 남자는 몸을 돌렸다. 어쨌든 가야 할 곳을 알았으니 목적지의 끈을 당긴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가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부스에 다가서자 심장 같은 벨소리가 점점 커진다. 쿵쾅대며 문을 연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다.
”아, 이것은.”
부스 안 공중전화 위에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조개껍데기는 신비로운 연분홍빛이 났는데 나선형으로 박힌 작은 불빛이 1초마다 깜박이며 사라지고 있었다.
"자비잖아…..”
맞다. 자비다.
<그날 밤, 남자의 방>
네모난 방, 시트지 벗겨진 바카라상이 창을 향해 놓여있다. 방의 가로는 바카라상으로 꽉 찰만큼 좁지만 세로는 창밖 숲으로 뻗어 무한하다. 의자에 걸린 보폴 많은 스웨터가 오래 기다린 허수아비 같다.
바카라상 중앙 얌전히 닫힌 노트북 위에는 연갈색 조개껍데기가 놓여있다. 조개껍데기는 남자가 작년 겨울 강릉에 갔을 때 해변에서 가져온 녀석이다. 준비 없이 당한 퇴직의 충격 때문인지,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매서운 날씨, 언제부터 밀려왔는지 모를 조개껍데기가 커다란 바위에 걸려 아무렇게나 무참히 쓸려 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핑크빛이 돌았고 나선형에 예쁜 무늬를 갖고 있었다. 아마도 한때는 싱그러운 생명이었을 것이다. 멋진 꿈을 꾸었겠지. 잘 살고 싶었을 것이고, 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다 실망하고 부딪히고 너덜너덜해져 어느 날부터 서서히 속까지 비어버렸다. 못쓰게 되었으면 차리리 부서지거나 멀리 쓸려가 흔적조차 남지 말지... 모질게 다루다 남겨진 네가, 왜 여기 미련하게 바위를 붙들고서 파도와 바람을 맞고 있냔 말이다….
남겨졌을 뿐이다. 쓰이다 쓰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버려진 것들은 잔해가 되어 여기와 있다. 조개껍데기에‘자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모두가 아는 그 자비 말고, 조개, 조가비…. 하다가 ‘자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이 녀석과 썩 어울린다.
'넌 자비야.'
남자는 나지막이 조개껍데기의 이름을 불렀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남자는 ‘무명(無名)’이란 글자가 슬펐다. 노래를 부르지만 이름 없는 가수가 슬펐고, 연기를 하지만 이름 없는 배우가 슬펐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서류를 작성하고, 누군가는 야구를 하고, 청소를 하며, 택시를 몬다. 누군가는 간절히, 누군가는 살기 위해 그렇게 한다.
분명 여기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없다 한다. 비어버린 속 사정, 메말라 버린 목소리를 자세히 듣지 않고, 겉으로 판단하고 재단하여 평가 내린다. 분류하여 줄을 세워 규정짓는다.
문득 다시 찾아온’ 의미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 꼬리를 문다. 집착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남자는 또다시 욕망을 질문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려고 온라인 게임을 다니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다. 어느덧 온라인 게임생활 25년, 글을 쓴 시간도 그만큼이다. 독특했던 문체는 오래되어 느슨해졌다. 꽃은, 가장 찬란하던 시간을 지나 피우지도 못한 채 혼자 시들어 간다. 남자는 기도했다.
’ 신이시여. 나의 손이 늙어갑니다. 생기 잃은 얼굴이 시간이 얼마 없다 다그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남자는 팔을 구부려 베개를 만들고서 이마에 댔다. 요즘은 정말로 툭하면 피곤해진다. 몇 달째 살이 많이 빠져서인지 기력이 없다. 남자는 노곤해지며 그 상태로 바카라상에 얼굴을 파묻는다.
<다시, 터미널 대합실 전화 부스>
조개껍데기'자비'에 박힌 조그만 빛이 서서히 깜박이며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정말로 모든 게 사라질지 모른다. 남자의 가슴이 다시 쿵쾅거린다. '자비'를 쥐려 뻗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그때, 음성이 들려왔다. 조개껍데기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잔해에 남은 남자아이의 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