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여 53

2/5

by지레인

2.


잿빛 속에서_

고개를 돌리던 남자가 흠칫 굳어버렸다.


‘사람이다!’


틀어진 어깨너머 분명 소년을 보았다. 덩치를 보니 고등학생쯤 되는 것 같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소년은 통로를 지나 반대편 창가에 앉아있었다.


‘정지된 터미널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소년의 공간은 초여름 아카시아 잎처럼 싱그런 빛을 냈다. 진녹색 교복이 숲처럼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 밖은 새벽을 지난 아침이다. 창밖을 향해 가려진 얼굴이 펼쳐진 바카라처럼 저절로 읽힌다. 꿈을 꾸듯 저 멀리 그림을 그리는 시선, 고독함을 굳게 다문 순수하고 여린 의지. 그 표정이 아프도록 아련하여 남자는 차마, 멍하니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창을 통해 반짝이는 바람이 불어 남자 대신 소년의 옆머리를 매만진다. 춤추는 뽀얀 먼지가 진녹색 어깨로 녹아 떨어진다. 머리카락으로, 등으로 살짝 보이는 팔과 발등으로… 눈송이 같기도 하고 안개꽃 같기도 하다. 그 끝에 닿은 진녹색은 묵처럼 번져 흐릿해진다. 꼿꼿한 소년은 움직임이 없었으나 빛과 바람과 먼지가 일렁여 소년의 공간은 경계 없이 아득해진다.


엇, 그런데 이건 또 뭐지? 사라져 버렸다! 정말로 그러고만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 허리를 곧게 세운 소년은 없고, 그 자리 노인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흩어져버렸다. 눈을 비벼 다시 봐도 소년이 아니라 등이 굽은 노인이다.


그래, 제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고작 40분 정도 남은 시간에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가 대수겠는가. 그러니까 잔여 40분은 미쳤대도 미친 채로, 선택의 여지없이 그대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시간 아니냔 말이다. 뭔가를 새로 하거나 고치기엔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도 못마땅한 시간. 남자는 기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중간에서 치열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어느새 그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 앉았을 때, 노인은 흘끗 보지도 않고 다만 미소 지었다. 대합실 유리문 틈으로 긴 빛줄기가 들어오자, 노인은 눈을 감았다. 차분한 빛이 노인의 주름진 이마를 거쳐 콧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노인은 먼 곳을 응시한 채, 남자가 말을 걸기도 전 말을 시작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세상 향해 욕하는 자네 입술을 봤네. 서러움 복받친 핏기 어린 눈을 봤지.”
대꾸하고 싶었으나 남자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네. 현실에 눌리고 눌려 희망은 재가 되어 부서지고, 열정은 움트기도 전 좁은 방 안에서 화가 되어 피어올랐지. 서글프고 매운 연기가 눈을 가릴 때 자네는 차라리 내버려 두었네. 이제 그대는 어둠이 익숙해져 캄캄히 가려야 속이 편하지.”

"누구시죠? 누구신데 저도 모르는 저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죠? 아… 그것보다도 시간이 없으니 아신다면 이곳을 나가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영문도 모른 채 여기에 있습니다."

답답함을 느낀 남자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운명과 싸우려 하지 말게나. 집으로 가는 것뿐이야.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

"미치겠네, 그럼 여기서 멍하니 그냥 죽음을 기다리란 말입니까?"

태연한 노인의 태도가 남자를 화나게 했다.

"받아들임은 포기가 아니라네. 그대는 감싸 안을 수 있어. 왜냐하면 그대는 두려움보다 큰 존재니까. “
노인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잔여 53, 내 기회는 자네를 만나는 것이었네. 저쪽에서 보면 53분이든 53년이든 큰 차이가 아니거든.”
잠시 멈췄다 이어지는 노인의 목소리가 미세히 떨리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미안해. 자네의 슬픔. 매일매일 자신을 죽여, 그래야만 하루를 살 수 있었던… 약하기에 강해야만 했던 자네를, 오랫동안 외면해서 미안해.”
노인의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의 눈동자는 언제부터 차오른지 모르는 눈물로 뜨거워져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에겐 아들도 있고 아내도 있어. 자네는 괴로워했지만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었지. 그들은 자네를 사랑했네. 조금 전 언뜻 느꼈던 그대로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그대가 보는 것과 다르지. 하지만 그대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대의 현실은 그대에게 실체인 거야. 자네의 아픔을 너무 미워하지 말게나. 나는 너무 늦게 알았어. 내 맘대로 판단하고 집착하고 저항하느라 많은 힘을 낭비했지. 하지만 늦은 것도 아니야.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일어난 일들이지. 모든 것이 그래. “
남자는 울면서 웃었다.

노인의 혼잣말 같은 말들이 이상히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제 와 후회합니다.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만날 수 없을까 봐. 연락할 수도 없고, 안고 싶어도 안을 수 없을까 봐…. 가슴이 미어집니다. 늙어가는 아내와 커가는 아이를 볼 수 있을까요? 선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요. 그 애의 웃음소리는 정말이지 특별했어요. 그녀의 자상함도 그랬죠.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나는 정말 어찌해야 합니까. “
남자는 이제 거의 소리치고 있었다.


사랑한다. 어설픈 막춤과 다정한 미소를, 까르르한 웃음과 귀찮게 건드는 목소리를. 쓸데없는 잔소리와 냉혹한 지적질을, 말 안 듣는 말썽과 느긋한 게으름을, 나를 닮아 못마땅한 모습과 하루에도 몇 번씩 티격태격하던 싸움을... 사랑한다. 한때는 버거웠고 한때는 정말로 미워했지만 사실 나는 사랑했구나. 그저 함께이고 싶다. 함께 있는 동안 몰랐는데, 지금에 오니 사랑만 남았다. 평범한 삶을,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해. 그렇다면 정말 자신이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긴 싫은데…


“괜찮아질 거야. ”
노인이 말했다.
"물론 때로는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못 견디게 지쳐 포기하고 싶더라도, 편안해질 자신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나를 기억해 주게.”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남자는 안심했다. 살려달라던 기도마저 부질없이 느껴졌다. ‘어차피 그렇게 되겠지.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게….’ 거기에 이르자 남자는 문득 자유로워졌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남자의 시선도 유리문을 향한다. 비에 씻긴 투명한 유리로 하얀 풍경이 가득히 들어왔다. 가까운 건물은 옅은 안개에 덮여 보드라웠고, 저 멀리 가지런한 연둣빛 언덕은 새로운 태양으로 반짝거렸다. 고요함 속에서, 남자는 숨을 죽였다. 마치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듯. 제자리에 놓인 물건 같이. 아득한 풍경이 낯익은 고향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놓치면 평온함에 압도되어 돌아가기 싫을 거란 예감마저 들었다. 신비로운 새가 오묘한 날갯짓으로 늦가을 나뭇잎처럼 후드득 떨어져 다시 날아오른다. 배경 된 하늘은 연노랑이고, 새의 날개는 하늘색이다. 날아가는 새의 몸통에는 드문드문 복숭앗빛이 섞여 있었다.


그러기로 되어있던 걸 받아들인 것뿐인데, 많은 게 열리는 듯하다. 운명을 바꿀 수 없더라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나는 자유롭다. 우리는 모두 죽을 줄 알면서도 살고, 아닌 줄 알면서도 희망으로 꿈틀대는걸. 고통과 부질없음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인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어머니의 손은 모질고 거칠어 숭고하다. 끝이 있어 꽃을 피우고, 짧기에 영원을 추구한다. 지금 내가 여기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삶은 시들기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그제야 옆에 앉은 이의 모습이 보인다. 부드럽게 굽은 등, 길게 뻗혀 무릎을 움켜잡은 손, 오랜 세월 앉아 보낸 구부정한 어른의 어깨...


기다리던 노인이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곧 전화벨이 울릴 테지."

초점 없는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안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뜨거운 얼음을 삼킨 듯 머리 전체가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어떤 감정도 느낌도 아니었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익숙한 듯 희미한 갈색 눈동자... 남자는 노인의 눈에서 자신의 그것을 보았다. 그 순간 직감했다. 진녹색 소년도 눈먼 노인도 모두 자신이었음을…. 그들은 모두 나였다. 터뜨려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지만, 우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움푹 페인 지혜로운 눈이 남자를 스쳐 다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벨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현기증을 느꼈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익숙하다. 뚜렷하진 않지만, 남자와 가까웠던 누군가의 모닝콜이었다.


깨어날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잔여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