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여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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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지레인

1.


‘두려워 마세요. 당신의 뜻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려워 마세요. 당신의 뜻으로 여기에…. ’


귓속말인지 인지 꿈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무거운 눈꺼풀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낡은 천장 희뿌연 먼지 조각이 희미하게 할긋거린다. 벽에는 눅눅하고 그늘진 냄새가 났다. 눕혀진 눈으로 들어온 시멘트 바닥은 온통 침침한 잿빛이다. 남자는 마른 골반과 구부린 등으로 매끄럽고 약한 의자의 질감을 느꼈다. 느리지만 깨어나고 있다. …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습한 공기와 함께 더위가 밀려왔고 이내 정적이 흘렀다. 게으르게 끔뻑이던 눈이 뜬 채로 멈췄다. 아득한 음성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확장된 갈색 눈동자에 번듯한 서체가 선명히 비친다.


잔여 53


난데없는 단어와 숫자 조합이 오른쪽 손바닥 밑 얇은 피부 아래서 퍼렇게 맥박치고 있다. 잔여는 남아 있음이다. 53 남았다?… 그렇다면 0이 되면 어떻다는 거지? 죽는다는 건가? 당연하게도 죽음이 떠올랐다. 살고자 함은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래, 살아 있구나. 살아있다! 아직까진. 속으로 들어온 공기가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나가고 있다. 얼굴을 더듬는 손가락으로 굳은 턱과 도드라진 광대뼈가 만져졌다. 팔뚝을 꼬집었다. 통증이 느껴진다. ‘53초일까? 53분? 이미 1분은 족히 넘겼으니 초 단위는 아니다. 남은 시간이 53 년이라면 이렇게 손바닥 밑에서 카운트다운까지 할 일은 아니지. 역시, 53 분 남은 건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 같은 자리를 서성댄다. 멈춰서 두 눈을 치켜뜨고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마침내 남자는 머리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웅크린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을 모아 턱과 입술에 갖다 댔다. 그는 조금 더 애써보지만, ‘젠장.’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왔으며, 어떻게 온 건지. 어디서 난 소릴까? 목소리인지 기계음인지 아까 들은 게 진짜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정말로 내가 원했다면, 나라는 존재는 대체 어쩌자고 덩그러니 여기 자신을 던져 놓은 거지??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연결된 좁은 의자, 기둥에 걸린 구형 텔레비전, 낡은 시간표, 폐쇄된 창구, 자잘하게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아마도 방치된 터미널 같다. 가방도 핸드폰도 없다. 운행 시간표에 적힌 흐릿한 글자는 읽히지 않아 하나 도움되지 않는다. 남자는 빈 상점 근처를 배회하다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는 발꿈치를 들었다 놨다 하며 혹시 모를 기적을 빌었다. '오 신이시여. 제발.’ 신을 믿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만큼은 의지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떨궈진 눈이 다시 손바닥을 봤을 때 숫자는 53에서 47로 내려가 있었다. 달라진 앞자리가 서늘하다. 벌써 6분이 흐른 건가? 잠깐. 53에서 47을 빼면…. 6. 맞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했다. 버벅대는 동안 무심한 숫자는 47에서 45로 바뀌어 있다. 그새 또 2분. ‘미치겠네.’ 모아져 깍지 낀 양손이 의지와 상관없이 바들거린다. '45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뭔가를 할 수나 있을까?’


빗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유리문 너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가늘었지만,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은 비였다. 몇 시쯤일까. 날은 어둡지만, 한낮인지도 모르지. 하긴 어느 때면 어떤가.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낮인지 밤인지는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다. 답답함에 서러움이 얹힌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하고 있다. 대상도 이유도 없는 옅은 외로움... 분명치 않은 울쩍함이 때로 분노보다 아프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곧이어 커다란 슬픔이 밀려왔다. 마치 세상 모든 슬픔을 다 가져와 느끼려는 듯. 내게 왔지만 내 것이 아닌 슬픔.


... 고통스럽지만 부드럽다. 그 순간 존재 외에 모든 것이 희미한 남자에겐 방어와 공격의식이 흩어져, 말하자면 자신에게 가져와 증폭되는 저항의 에너지가 약해서... 거대한 슬픔은 멀리서 보이며 흘러갔다. 흘러가는 슬픔 사이, 깊은 공간 고요히... 아득한 평온이 비쳤다. 우습게도 이 상황에, 누가 봐도 절망적인 처지의 남자는 행복했다. 미친 걸까? 억울하고 비통하기 싫어서 정말로 미쳐버린 건가?


그러면 그렇지. 순식간에 돌아온 생각은 다시 남자를 비극으로 돌려놓는다. 널뛰는 감정을 보니 아무래도 미친 거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미친 거지? 큰 숨을 쉰다. 그래, 어쩌면 이 모든 게 미친 이의 환상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애초에 현실이 환상 아닌가? 각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 각자의 진실이 있을 뿐. 다들 자기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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