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
라다크의 중심 도시 레(Leh)는 해발 약 3,500미터에 있다. 시골의 작은 버스터미널처럼 아담한 공항 주변으로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설산과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황갈색의 암석산들이 거대한 성벽처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듯 웅장하게 솟은 산세를 보니 비로소 진짜 히말라야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온몸으로 밀려와 압도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매서운 공기였다. 뜨겁고 습한 발리의 공기에 익숙한 나는 차갑고 맑고 건조한 이 공기가 낯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이 서늘했고, 입안은 금세 말랐다.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몸에 남아 있던 발리의 온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는 도로는 한산했다. 하얀 콘크리트 벽에 나무 창틀과 테라스를 갖춘 건물들이 길을 따라 이어졌고, 그 너머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간간이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형형색색의 타르초(Tarcho)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 깃발들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자꾸만 눈길이 갔다. 길 곳곳에 놓인 화분에서는 파랑, 노랑, 흰색, 분홍빛 꽃들이 흔들렸다. 머리 위에서는 타르초가, 땅 가까이에서는 꽃들이 같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오래 눈에 남았다.
문득 눈가가 촉촉해졌다. 홀리를 떠나보낸 뒤 흘리던 눈물과는 조금 달랐다. 슬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눈앞의 풍경이 아름다워서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기분이 이상했다. 슬픈데 아름다웠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또 미안했다. 몸은 힘들었고, 마음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골목길 끝에 있어 차에서 내려 언덕을 조금 걸어 올라가야 했다. 배낭을 메고 얼마 되지 않는 샛길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약간의 오르막과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숙소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났고 입안에서는 쇠 맛이 느껴졌다.
체크인을 하다가 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무거웠고 머리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속력으로 한참을 달린 뒤 같았다. 내가 숨을 몰아쉬자 주인 아주머니는 괜찮냐고 물으시며 짜이를 내어주셨다. 진한 밀크티에 생강 향이 섞인 차였다. 녹진한 우유 맛과 찻잎의 향,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졌다. 따뜻한 차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숨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머리도 금세 한결 나아졌다.
방으로 향하면서 그제야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고, 한국이나 발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키가 아주 큰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샤, 샤’ 소리를 냈다. 내 방 앞에는 살구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언제든 따 먹어도 좋다고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정면으로 큰 창이 난 오두막 스타일의 방을 배정받았다. 아주머니는 고산병이 올 수 있으니 오늘은 물을 많이 마시고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금 전 괜찮아졌던 숨이, 방까지 고작 몇 미터를 걸었다고 다시 차올랐다.
한참을 방에서 쉬고 나니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 물을 잔뜩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레의 풍경이 자꾸만 궁금했다. 오래 누워 있기도 답답해 결국 천천히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는 탓에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걸음 속도로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았다. 한국의 가을 날씨 같았다. 함께 온 홀리도 좋아할 것 같았다.
돌담길을 걷는데 문득 홀리가 집 담 위를 따라 걷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이 돌담을 하나하나 밟으며 야옹소리를 내며 예전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레에 도착한 뒤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슬픔보다 먼저, 홀리와 함께 이곳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함께 온 것은 아니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을 홀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러다 길 한쪽에서 검은 소 한 마리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얼마쯤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그 소가 아직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걸으면 소도 천천히 걸었고, 내가 멈추면 소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까만 몸 때문이었을까. 자꾸 홀리가 떠올랐다. 우연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마치 홀리가 다른 모습으로 잠깐 나를 따라와 주는 것 같았다.
그날 레의 거리를 걷는 동안만큼은 홀리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쌕쌕거리는 숨을 천천히 몰아쉬면 나는 천천히 레의 골목을 하루 종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