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6
나는 자주 오해를 받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해받기 쉬운 얼굴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나를 차갑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생각보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 말들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예민하고 쉽게 불편해지는 사람이다. 다만 그걸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입사 동기가 내게 건넨 첫마디가 아직도 기억난다.
“첫인상은 좀 까칠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털털하시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생각 보다가 아니라, 그냥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웃으며 말했다.
“네,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더라고요.”
나는 종종 이렇게 나를 정정하지 않는다.
그 이후로 나는 ‘성격 좋고 무던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말투를 부드럽게 고치고, 불편해도 괜찮다고 말하며 표정부터 관리했다. 사실은 불편한데도 괜찮은 척하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20대의 나는 그렇게 나를 다듬기보다 눌러두는 데 시간을 썼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그 이미지가 오래 유지되기를 바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서른 즈음이 되자 이상하게도 덜 감추게 되었고, 더 이상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오해해도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일이었고, 그때마다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관계는 모든 부분이 맞아야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일부만 맞아도 충분히 유지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조금 편해졌다.
나의 눈빛만 봐도 감정을 읽어내는 10년 지기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 나는 한 번 결혼생활의 복잡한 감정을 쏟아낸 적이 있다. 위로를 듣고 나니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날의 대화는 거의 전부 내 이야기였다.
결혼이 무산된 친구 앞에서 나는 오히려 내 결혼생활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건 솔직함이라기보다 배려가 부족한 태도에 가까웠다. 나는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조차 나를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날 때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공감은 때로 솔직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반대로 어제 처음 만난 사람과는 결혼과 육아라는 공통된 경험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로의 시간이 겹치는 지점이 생기자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늘어났다.
그 순간들이 지나니 깨달았다.
관계는 ‘얼마나 솔직한가’보다 ‘어디까지 맞닿아 있는가’로 유지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나를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상황에 맞게 일부를 꺼내어 보여준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그 방식이 오히려 관계를 오래 가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못남’이라는 단어는 나를 위축시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예민하고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기도 한다. 배려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어색하다.
나는 여전히 나의 못남을 고백하며 살아간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것을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숨기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