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4
잘 분배된 에너지로 하루를 성취감 있게 마무리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요즘의 나는 마치 데드라인에 쫓기듯 하루하루를 겨우 '쳐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왜 나는 내가 바라는 이상향의 삶을 살지 못하는 걸까. 억누르며 버티다 보면 결국 무뎌지게 될지, 아니면 어느 순간 폭발해 버릴지 알 수 없지만, 슬롯생활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도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한다.
숨이 가빠올 때면 잠시 그 틈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유치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원장 선생님은 50여 명의 아이를 강당에 모아놓고 노래와 율동을 가르쳐 주셨다. 여섯 살 아이의 눈에도 왁자지껄 제각각인 친구들의 모습은 어안이 벙벙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에게 노래의 가사나 음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누가 더 큰 소리로 악을 쓰느냐의 대결 같았고, 율동 시간은 넓은 행동반경 탓에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다.
'엄마는 나를 왜 이런 곳에 보냈을까.' 소음의 파도 속에서 나는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법을 일찍이 터득했다.
단체 활동이 끝나고 개별 활동 시간이 되면, 나는 혼자 조용히 머물 아지트를 찾았다. 아무리 놀기 좋아하는 아이라도 내게는 고요함이 절실했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떼창'의 잔상을 지워내야 했기 때문이다.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선반 아래의 틈이나 놀이기구 사이의 좁은 공간이 나의 안식처였다. 친구들이 소꿉놀이를 하자며 나를 불러내도 나는 그 작은 요새에서 나가지 않았다.
유일하게 평화로웠던 시간은 온화한 목소리의 미술 선생님과 함께하던 수업뿐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내가 추구하는 그림체를 고민하며 온전히 나만의 세계를 완성해 낼 때, 그 뿌듯함은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해 주었다.
관계의 과잉 시대 속에서 '자발적 고립'은 나를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다. 주변 관계와 업무에만 얽매여 지내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길 힘이 나지 않는 것도 결국 내면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생각의 결을 정리하고 나면, 비로소 내가 견딜 수 있는 관계의 경계와 지양해야 할 지점들이 선명해진다.
타인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 관심을 받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면 그것은 과도하게 부풀려진 거품에 불과하다.
그 거품이 꺼졌을 때 찾아오는 허무함은 결국 ‘타인에 의한 상처 입은 고립’으로 남을 뿐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고립은 나를 다시 숨 쉬게 하는 가장 단단한 휴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