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0m 고지에서 다시 만난 여름날의 기억
태백과 정선을 잇는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면 해발 1,330m, 하늘과 맞닿은 듯한 고갯마루에 닿는다. 그곳이 만항재다.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품어두었던 풍경 하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 해발 1,330m의 만항재.
오래전 그 고개 정상에서 마주했던 야생화의 바다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정갈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인위적으로 꾸며낸 정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바람과 안개가 빚어내고 비가 키워낸, 순전한 자연의 화원이었다.
그 기억이 좋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 길을 다시 걷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여정에서 그 푸른 고개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발길을 옮기는 내내 오랜 벗을 만나러 가는 듯 마음이 설렜다.
만항재에 발을 디디는 순간, 무더웠던 한여름은 금세 사라졌다.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수많은 고산 야생화가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난 모습은 점봉산 곰배령의 천상화원을 떠올리게 했다.
울창한 숲 아래, 구름과 안개를 이불 삼아 드넓게 펼쳐진 꽃밭은 한여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 정원 가운데 하나였다.
화려함으로 사람의 눈을 붙잡는 꽃들이 아니었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계절을 견디고, 때가 되면 조용히 피어나는 작고 소박한 꽃들이었다.
젊은 날에는 그저 스쳐 지나쳤을 이름 모를 풀꽃 하나에도 이제는 가만히 눈을 맞추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치열했던 삶의 비탈길을 지나와 이 높고 고요한 화원에 서고 보니, 세월을 견디며 자연의 결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조금 늦게 피어도 괜찮고, 남보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제 계절을 견디고 제 자리에서 피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아름다운 고개를 다시 걸을 수 있어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었다.
만항재의 바람과 꽃들이 건네준 한 줄기 맑은 여백을 가슴에 담으며,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조용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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