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함과 무거움 사이

퇴사 후 백수

by버티기

방구석 백팩이 애처롭다. 다리 힘 기른다며 무겁게 해서 매고 다닐 때는 내려놔도 꼿꼿했다. 퇴사하니 매고 다닐 일이 없어,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찌그러져 있다. 퇴사하기 전,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이 다 빠져나가 버렸다. 일부 생각대로 움직인 것이 있긴 해도, 허탈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역할을 잊은 백팩 마냥, 방구석에 쓰러져 있는 기분이다. 오월부터 아내의 출근 시간이 빨라져 아침 풍경이 정확하게 역전되었다. 출근길 배웅한 후, 아내가 남긴 못마땅한 눈길이 부담스러운 감정으로 남아있다.


변화라는 것, 항상 혼란스러움을 동반한다. 호기스럽게 퇴사를 감행했지만, 혼돈 속에서 쪼그라든 일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간은 생각대로 쓰이지 않고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우선순위 첫 번째였던, 홀로 있는 아버지 생활여건 바꿔주는 일은 지지부진하다. 아버지의 막무가내 거부 반응에 막혀, 여전히 생각만 복잡하다. 답답한 마음에 남동생과 의견도 나눠보지만, 여전히 뾰족한 방법을 찾기 어렵다. 이대로라면 퇴사하게 된 당위성이 무색해질 위기다.


그나마 두 번째 우선순위인 재충전이 현재진행형이라, 조금이나마 퇴사의 당위성을 살려주고 있다. 몸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건강검진을 마쳤고, 치과와 안과의 진료와 치료가 정상 진행 중이다. 부족한 실무 능력 업그레이드를 위한 교육도 6월 중순 이후부터 받을 예정이다. 그리고 비중을 두었던 심신 회복을 위한 휴식, 체력 단련,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고 늘어만 가는 허허함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재취업은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가느냐에 따라 그 시기가 앞당겨질 듯하다. 현재까지 재충전을 위한 일정 중에서 가장 보람으로 남는 것을 들라면, 가족들과 함께 한 일본 여행일 것이다.


일본 여행은, 내가 아들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림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아내의 강한 욕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패키지보다는 자유여행이어야 했고, 두 번 경험이 있었던 큰 아들이 여행의 시작과 끝을 설계했다. 퇴사든 휴가든 모두 계획된 일정에 맞출 수 있어, 항공권은 미리 예약할 수 있었다. 일본을 선택한 이유는 음식과 문화가 가장 유사해서 생소함에 의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근거리라서 여행으로 인한 피로감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네 식구는 오사카행 항공편을 타기 위해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만났다. 그리고 4박 5일 후,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여기서 교토와 오사카 기행문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은퇴 후 들어간 회사를 재충전이라는 명목으로 퇴사한 이 시기, 일본여행이 나에게 주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여행을 마치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일본이라는 여행지의 선택이 유효 적절했다는 것이다. 첫 방문지 청수사를 오르는 길, 상가에서 내어놓은 표지판 문구가 눈에 꽂혔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언일행(一言一行)', 나름 의미를 해석하기를 '한 번의 기회도 소중히 여기고, 한 번 뱉은 말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였다. 나중에 찾아본 진정한 의미는, '내 평생에 단 한 번뿐인 귀한 인연과 순간이니, 그때 나누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도 온 정성과 바카라임을 다 해야 한다, '라는 의미였다. 지금도 이 말이 가슴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여행시간을 벌기 위해 매번 일찍 숙소를 나섰다. 건널목에서 느릿느릿 지나쳐가는 노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단정한 출근 복장에 백팩을 메거나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행동은 느렸지만 눈초리는 살아있었고, 목적지가 분명한 듯 보였다. 공원에서 장기나 두고 있을 나이였는데 말이다. 이것뿐만 아니다. 타는 택시의 기사들이 거의 대부분 노인에 가까웠다. 안전운전에 대한 조바심이 많은 아내가 앞 의자를 꼭 붙잡고 갈 정도였다. 하지만 운전은 물론 단정한 외모에 친절한 서비스까지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큰 아들이 검색해서 찾아 간 맛집은 다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집이었다. 음식의 맛, 들고 날 때 손님을 대하는 정감 있는 행동은 놀라웠다. 여행기간 내내 눈에 띄는 노인들은 분명, 우리보다는 생동감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30년 먼저 고령화슬롯로 진입하였다. 고령화를 따지는 기준은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7% 이상이 고령화슬롯, 14% 이상이 고령슬롯, 20% 이상이 초고령슬롯이다. 우리가 일본을 무서운 속도로 따라잡고 있으며, 초고령슬롯 기준으로 10년 정도 차이만 보이고 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우리는 과연 초고령슬롯의 대비를 잘하고 있는가?'였다.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드는 느낌은, 일본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고령화 정바카라을 안착시켜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65세를 목전에 둔 사람으로서, 스치는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이다.


청수사, 은각사, 금각사, 오사카 성... 모두가 그들의 역사이다. 그 자체로 보아줄뿐, 우리와 견주어 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느끼고 싶었다. 이번은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을 고려해서 노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방향이 설정되었고 생각도 명확해졌다. 그것은 재충전이 되고 나면,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것이다. 타국인에게 주름진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몇 개국 언어를 섞어가며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설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백수 생활, 홀가분함과 무거움 사이를 오간다. 십 년 후, 내가 그 자리에 서 있기를 소망해 보면서 오늘을 만들어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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