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슬롯 발간 5.18 의료활동 바카라에 수록된 이무원 광주적십자병원장 글
2021년 말,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적십자병원에 근무하셨던 한 선배 직원의 부고 소식을 듣고 온라인카지노에 기억되는 사람이라는 글을 남겼다. 몇 달 뒤 당시 광주적십자병원장이셨던 이무원 원장님의 따님이 이 글을 보고 댓글을 남기셨다. 아버지가 건강하시지만 옛날 기억을 많이 잊어버리셔서 당시 아버지의 기록이 적십자병원에 남아있지 않을까 찾던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가지고 있는 자료가 없기에 본사 홍보팀이나 지사, 5.18 관련단체에 문의해 보면 좋겠다는 답변을 남겼고 본사와 연락해 보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겠다는 대댓글이 달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제가 5월 18일이었다. 오늘 회사 게시판에 <광주민주화운동 기념 시민헌혈 및 광주적십자병원 역사 관련 자료 스크랩>이 올라왔다. 광주전남혈액원 담당자가 여기저기 흝어져 있는 자료를 한 곳에 모아놓는 작업을 했다. 화일에서 광주적십자병원장이셨던 이무원 원장님의 기고글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적과 아군 구분없이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무료진료를 결정해서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글을 보니 그때 댓글을 다셨던 따님이 떠올랐다. 혹시 이 글은 가지고 계실까. 모를 일이지만 가족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싶어서 퇴근하고 글을 올려본다. 누구나 읽어도 그때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다.
---------------------------------------
이무원 (목포녹십자병원장, 당시 광주적십자병원장)
80년 5월 21일 오후 5시경으로 퇴근하려고 있었는데, 도청쪽에서 콩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밖이 소란하고 환자가 몰려오는 완전 수라장이 되었다. 80년 당시 적십자병원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 이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자니 병원이 어렵고 유료 환자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렵지만 '무조건 개방해서 치료를 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직원들은 퇴근하지 말고 근무하도록 조치했다.
그날 전대병원 욕상에는 기관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대병원은 군인이 점거하고 있어서 모두 적십자병원으로 치료받으러 들어왔다. 외과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 수술을 한 다음 전남대병원, 기독병원으로 후송해 보냈다.
2백~3백명 헌혈자 몰려
도중에 병원에서 피가 부족해 혈액원 직원들에게 헌혈버스를 통해 헌혈자를 모으게 했다. 대략 2~3백명 가량이 왔는데 평생 처음으로 많은 헌혈을 받는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적십자 본사에서도 알아서 각 지역에 피를 모집해 보냈는데 당시 시내에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적십자기를 달면 들어올 수 있었다. 후송 등 운반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적십자 완장을 차고 환자를 싣고 운반을 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유일한 차가 적십자 본사에서 피를 보낸 차인데 당시 서영훈 사무총장이 직접 타고 들어왔다. 애로사항으로 산소가 부족하다고 말해 전북에서 5백통을 거둬 싣고 들여와 각 병원에 피와 산소를 공급하였다.
치료에 있어서는 경찰관, 군인, 시민 모두를 가리지 않고 돌봤다. 군인 한 사람이 병원 앞 하천에 떨어져 돌멩이 등으로 맞고 있는 것을 병원직원들이 싣고와 치료를 했다. 병원에서는 그 군인을 얼른 옷을 벗겨 갈아 입히고 별실을 마련 치료를 했다. 30분쯤 후에 학생들이 찾아와 그 군인이 "어디에 있는가?" 묻자 죽어서 영안실에 안치해 놓았다고 말했다. 모두 죽은 줄 알고 돌아가자 밤중에 앰블런스로 실어 통합병원으로 보냈다. 나중에 치료를 잘해 살아서 원대복귀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전투경찰이 도청에 모이라고 해서 왔으나 광주가 객지여서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가 병원에 왔다. 전경 옷을 입고 있어서 큰일났다 싶어 병원 보일러실에 숨겨놓고 1주일 동안 밥을 먹이고 있었다. 그 전경들의 인적사항을 거의 적지 않고 보냈는데 보일러실 근무직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적십자병원과 병원 앞 천변은 학생들의 아지트였으며, 27일 군인들이 다시 점령하자 학생들은 낮에는 환자복을 입고 숨어 있다가 밤에는 나가 활동했다.
민주주의를 하자는 주장에 계엄군이 총질을 한 것은 너무했던 것 같다. 난리속에서도 전기, 수도, 전화는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입원환자가 70~80명이 되어도 쌀, 부식 등을 전화하면 모두 보내주었다. 약품회사도 연락하면 무조건 약품을 갖다 주었으며 그때는 모든 물품 공급이 제대로 되었다.
당시 병원에서 잘 때 침대에 누워있으면 유탄이 무서워 매트리스를 깔고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새벽 1~2시경 서무과 직원이 "학생들이 원장님 명단을 요청하니 꼭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을 전해 3층 원장실로 올라와 학생들과 면담을 했다.
학생들은 적십자병원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어 9백만원(아니면 9십만원으로 앞자리수가 9자였다)을 모금해 왔으니 전달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당시 상황에서 안 받을 수도 없고 난처해 전남적십자지사장인 박윤종씨한테 전화해 보니 잘 알아서 처리 하라는 말을 듣고 화장실에 가서 설득할 말을 생각해 보았다. "고맙소, 환자를 위해 일하는 것은 적십자의 기본임무 입니다."라고 말하고 돈보다는 환자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나눠주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 보냈다.
계엄군의 흑색선전에 대한 분노
한번은 국무총리가 광주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송정리 근방에서 방송을 통해 "광주에서 폭도들이 불법으로 공공기관을 점거하고 폭도들에 의해 사상자가 7~8명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화가나 시신들을 도청 앞 분수대 옆은 돌려가면서 안치해 놓았는데 적십자병원에서만 31구 정도의 시신이 있었다. 나는 당시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았고 환자를 무조건 받아서 무료로 진료하라고 지시했다. 환자중 고환에 총을 맞은 부상자도 있었고, 권총, 무선통신기 등이 병원내에 굴러 다녔다. 이러한 엄청난 상황에서도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일을 했던 것은 계엄군의 흑색선전에 대한 분노가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적십자병원의 5.18 부상환자는 외래 1백 50명 입원 20~30명으로 추정되며 2백여명 아니면 2백 50여명이 병원에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병원 직원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마치과, 소아과, 치과가 있었으며 인턴 5명 간호사 30~40여명, 행정직 20여명, 혈액원 직원 20여명이 근무했었다.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했는데, 가운에 피가 묻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과 헌혈을 하려고 줄서 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당시 직원들은 적십자정신의 사명감도 있었지만 시민들이 다치니까 우리도 치료를 해서라도 도와야겠다는 심정이 들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 같다.
2~3일 후에 서석동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아이들과 아이엄마는 문지방에서 이불을 벽으로 돌려서 그 가운데에 모여 앉아 있었다. 집에서 자지 않고 다시 병원에 돌아왔는데 차가 없어 앰블런스를 타거나 환자수송을 위해 적십자 기를 꽂은 차량이 사방으로 돌아다녀 그 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적십자 깃발을 차에 꽂고 다닌 것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환자를 수송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나중에 정부에서 진압을 한 후 유공자에 대한 표창이 있었을 때 시민군 편이라고 표창을 받지 못했던 적이 있다. 아마 시민들이 적십자기를 꽂고 다녔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 적십자 본사에서 승인사항은 아니지만, 어려운 병원 사정에서 무료 진료를 결정했던 것이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