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으로 읽는 주방과 거실
하나의 집 안에서 주방과 거실은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듯하지만, 실은 가장 먼 거리에 서 있다.
결코 동등한 위계의 공간이 아니다.
많은 아파트에서 거실은 집에서 가장 좋은 방향에 위치해 있다. 가장 넓고 커다란 창을 품어 온종일 볕이 잘 드는 최상의 자리이다. 반면, 같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주방은 남향 거실의 반대편인 북쪽에 어두컴컴하게 물러나 있기 마련이다. 공간도 좁은 데다 온갖 살림살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한낮에도 조명을 켜지 않으면 금세 어두워진다.
명절이 되면 이 작고 어두운 주방으로 여자들이 몰려든다. 비좁은 동선 속에서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음식을 조리하고, 연신 설거지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주방 공간 너머 거실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거실에 앉은 가족들은 여유로운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누리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편안히 앉아 다과를 즐기는 이들을 등지고, 남아있는 일거리를 처리하는 주방의 여자는 앞치마를 두른 채 붉은 고무장갑을 끼고 서 있다. 얼굴로 올라오던 열기는 이내 머릿속까지 뜨겁게 가득 채우고, 가끔은 미치도록 억울하고 화가 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부산 시댁을 찾은 며느리 지영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어머니의 주도하에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지영 뒤로, 시아버지와 남편 대현은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다.
주방과 거실은 벽 없이 탁 틔어 있어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 투명한 경계 사이로 ‘노동’과 ‘휴식’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가 갈라져 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노동의 결과물로 차려진 음식과 다과를 누린다.
영화 속 시댁 장면에서 지영은 단 한 번도 거실의 안락함 속에 존재하지 못한다.
그저 주방에만 갇혀 있다.
시부모님과 남편, 아이, 그리고 나중에 도착한 시누이 가족들까지 어우러지는 오순도순한 풍경 속에서, 지영은 그 단란함에 끼어들지 못하는 '외딴 관람객'처럼 주방이라는 섬에 서 있을 뿐이다.
시어머니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며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제는 며느리를 거느리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시어머니도 주방에서 지영과 함께 일한다. 하지만 그녀는 일을 감독하고 지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그렇기에 주방 의자에 앉아 일을 지시할 수도 있고, 언제든 거실로 걸어 나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존재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어느 아파트의 평면도 안에는 이처럼 기울어진 가족 간의 위계가 숨어 있다. 그 안에서 '집'이라는 장소는 더 이상 평화롭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서울, 지영의 집은 온통 어린아이의 물건으로 가득하다. 거실도, 주방도, 욕실도 아이 용품에 점령당해 있다. 지영은 종종 거실 베란다로 나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평범하고 단란한 집이다. 그런데 정작 '지영'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그 집 어디에 있는 걸까? 지영 역시 알고 있다. 분명 행복하고 감사해야 할 가족이자 집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어딘가 비정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적 살아온 가정환경, 슬롯와 온라인 게임에서 부딪혔던 벽들, 결혼과 시댁으로 이어지는 삶의 고단함과 굴곡들……. 단란해 보이는 아이 물건으로 가득 찬 집 안에서는 정작 '인간 김지영'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지영은 집 안에 두지 못하고 외부에 떼어놓고 온 자기 자신을 아득히 바라보듯, 베란다 끝에 서서 홀로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지영의 엄마 역시 그 시대를 감내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엄마에게도 학교 선생님이라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오빠들을 공부시키느라 청계천에서 옷을 만들어야 했다. 엄마는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다고 지영에게 담담히 말한다.
어릴 적 지영의 친할머니는 손녀딸들에게 똑같은 가치관을 대물림하려 했다. 지영과 언니에게는 조신하게 밥 차리는 일이나 도우라고 했고, 커서 엄마에게 효도하겠다는 어린 지영에게는 여자아이들은 커서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 시절 우대받으며 자란 아버지는 지영이 성추행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조차 딸을 탓했다.
"단정히 입고 다녀라. 절대 아무나 보고 웃지 마라. 바위가 굴러오는데 가만있을 거야? 못 피하면 못 피하는 사람 잘못이야."
엄마는 딸들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강고한 시어머니의 가부장적 가치관 속에 자란 남편은 지영에게 조용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며 그게 너에게 어울린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고, 더 이상 대물림 하고 싶지 않은 엄마는 지영에게 나대며 다니라고 하며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지영은 엄마의 응원에 힘입어 온라인 게임인이 되었지만, 슬롯적 차별은 여전했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차별에 맞서 당당히 견디는 여성에게는 '센 여자'라는 라벨이 붙는 것을 지영은 보았다. 그리고 지영은 다시 가부장적인 집안의 부산 남자와 결혼을 했다.
시대는 분명 변했다.
그러나 할머니에서 엄마, 그리고 지영에게로 이어지는 차별의 고리는 여전히 집 안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남아 있다. 세대가 바뀌어도 윗세대로부터 내려오는 관계의 물줄기는 정화되지 않은 채 녹슨 물을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다. 다들 겉보기에는 평안하고 평범한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 집은 결코 편안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낡고 녹슨 물은 비로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려는 새물과 부딪히며 거센 충돌을 일으킨다.
집 밖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해 커피 한 잔을 사고 마시는 일.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짧은 행위 뒤에 숨은 집안일과 육아의 고단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 슬롯에서 주부가 전담하는 육아와 가사 노동은 오랫동안 '당연히 제공되는 무상의 봉사'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어느 날 지영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커피를 사다가 바닥에 쏟는 실수를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온라인 게임인 남녀들은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 나와서 피해를 준다"며 혀를 차고 지영을 '맘충'이라 손가락질한다.
그 순간 지영은 그중 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저를 아세요?"
왜 우리 슬롯는 모르는 타인을 향해 단면만 보고 쉽게 판단하는 얕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걸까? 타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으며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또 어떤 꿈을 꾸며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대화를 나누고 알아갈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파편적인 모습으로 한 사람의 삶을 너무나 쉽게 단정 지어 버린다.
집 안에서는 주방이라는 섬에, 집 밖에서는 낯선 이들의 시선 앞에. 엄마가 된 지영이 편히 앉을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명절을 보내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안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쓰는 진한 사투리는 나를 금세 시댁이라는 공간으로 다시 이동시켜 놓는 듯했다. 2019년도에 이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로부터도 벌써 7년이나 지났지만 영화에서 보았던 시댁의 거실 풍경을 난 아침에도 똑같이 보아야 했다.
그날 아침도 시어머니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허둥지둥 일어나 제사 준비를 했던 나였다. 우리 시댁은 형님이 음식을 사 오는 덕분에 영화 속 지영이네처럼 음식 장만이 과하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주방과 거실 사이에 감도는 그 묘한 이질감은, 내가 부산 남자와 결혼해 살아가며 접하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풍경이다.
나 역시 평범한 아파트의 거실과 주방 사이에 존재하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기울어진 관계의 공간' 속에서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사람이다.
시대가 변했고 세상은 바뀐 슬롯적 가치관의 공간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어쩌면 미혼으로서의 개인의 삶이나 슬롯적 구성원으로서의 외부 열린 슬롯에 있을 때는 분명 나의 부모님 세대와는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왔을 때 깨달았다. 여전히 슬롯적 가치관이 멈춘 세대의 개인이 머물고 점유하는 공간 안에서는 공간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나 부산의 어머님이 점유하는 공간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굳건함 마저 보인다.
그런 부산집에서의 아들로서의 남편을 보며 서울로 돌아오면 나는 어린 아들에게 설거지를 시키고, 밥 먹고 난 후에 식탁을 정리하게 하고, 빨래를 개는 일을 시킨다. 이젠 남자도 여자도 아닌 개인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강조는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내가 새로운 집을 구하게 된다면, 주방이 구석에 박혀있지 않고 햇살이 잘 드는 남향으로 밝고 넓게 자리 잡은 집을 얻고 싶다.
하지만 오늘날 아파트 평면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구조의 집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공간은 단순히 벽과 기둥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때로는 공간 자체보다 훨씬 더 막강하게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나는 묻고 싶다.
언젠가 어둡고 구석진 주방과 밝고 넓은 거실의 위치적 관계가 뒤바뀌는 날이 올까? 그렇다면 그런 날은 그 공간 속에서 형성되어 온 인간의 기울어진 관계도 마침내 바뀐 날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