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방
우리는 살면서 언제 이사를 하게 될까?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본다면, 우리는 어떨 때 이사를 하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삶의 이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내 의지로 선택한 ‘자발적 이사’, 그리고 삶의 거센 파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비자발적 이사’.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찬실이의 이사는 명백히 후자였다. 오랫동안 아끼고 함께 일해 온 감독님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찬실이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그 이사는 단순히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열정을 쏟아붓던 영화라는 세계, 그 안에서 견고했던 자신의 역할, 그리고 이 일을 오래도록 계속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마저 잃어버렸음을 의미했다.
찬실이는 직업을 잃었고, 가난해졌으며, 한순간에 삶의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밀려났다.
비자발적인 이사는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내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찬실이는 차조차 다닐 수 없는 가파르고 긴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동네, 그곳 주인집 할머니의 작디작은 단칸방으로 비자발적 이사를 간다.
비좁은 단칸방, 누군가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산동네 할머니의 집에서 찬실이가 오롯이 혼자 점유할 수 있는 곳은 작은 단칸방 하나뿐이었다. 반지하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닌, 대신 산바람만큼은 시원한 작은 방. 영화에선 그렇게 표현한다.
방문을 나서면 나머지 공간들은 주인집 할머니와 함께 나누어야 하는 집이었다. 할머니가 수십 년간 쌓아온 세월의 흔적 속으로 찬실이라는 새로운 삶이 들어온 것이다.
그 작은 방으로 찬실이가 들고 들어온 물건 중, 그 존재를 가장 명확히 말해주는 것은 영화와 관련된 바카라들이었다. 꿈을 포기하겠다는 마음으로 방 밖에 내놓았던 바카라들을, 찬실이는 결국 영화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안으로 들여놓는다. 방 안에 무엇을 두고 무엇을 내놓는가는 때로 한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의 방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남들의 기준이나 눈으로 본다면 그 가파른 산동네 단칸방은 초라한 '실패의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찬실이에게 그곳은 타인에게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방, 당장 내일 무엇이 될지 몰라 방황하더라도 나 자신으로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준다.
비자발적 이사가 뜻밖에 데려다준 것은, 바로 이런 방이었다.
그 이동이 슬프거나 씁쓸한 패배로만 느껴지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공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채우는 '관계의 온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탈길을 따라 이삿짐을 옮길 때 힘겨운 찬실이의 곁을 같이 지켜주는 후배들이 있었고, 남이었지만 점차 가족이 되어가는 따뜻한 주인집 할머니가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때로는 나를 숨 쉬게 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어깨를 내어주는 식구가 되기도 한다.
많은 작품이 초라한 공간을 통해 인생의 실패를 조명한다면, 이 영화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관계를 조명한다. 우리의 소박하고 좁은 방들도 마냥 슬퍼하거나 좌절할 곳만은 아니라고, 나지막이 위로해 주는 듯하다.
금지된 방에서 나타난 속옷 차림의 장국영
주인집 할머니에게는 “그 방은 안 돼”라며 들어가지 말라는, 금지된 방이 하나 있었다. 먼저 떠나보낸 딸의 유품과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 방이다. 금지된 방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은, 타인이었던 할머니와 찬실이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식구가 되어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마음이 닿지 않고서야 자신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을 선뜻 내어줄 수 없는 법이니까.
바로 그 금지된 방에서, 뜬금없이 장국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하얀 속옷 바람으로. 그 엉뚱하고 환상적인 장국영은, 실은 찬실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를 향한 마음이자 그 깊은 내면의 분신이었다. 장국영은 찬실이가 과거에 사랑했던 영화였고, 포기했다고 여긴 꿈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었고,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희망이었다.
할머니의 시간이 멈춘 방에서, 찬실이의 멈춘 꿈이 걸어 나온 셈이다.
소피의 집, 돌봄의 집
영화에는 또 하나의 주요한 공간이 등장한다. 찬실이와 함께 일했던 배우 소피의 집이다.
더 이상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 프로듀서가 된 찬실이는 생계를 위해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찬실이는 묵묵히 무릎을 꿇고 소피 집의 바닥을 닦고, 바카라장의 먼지를 털어내며 정성스레 집안을 정돈한다. 그리고 가끔은 덜렁거리는 소피마저 돌보아 준다. 찬실이는 공간을 돌보며 자신의 마음을 돌보았을 것이고, 소피를 돌보며 일에 대한 마음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찬실이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성실하고, 정직하며, 사람을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는 사람.
감독은 왜 찬실이에게 두 개의 공간을 안겨주었을까.
산동네 단칸방이 찬실이가 돌봄을 받는 곳이라면, 소피의 집은 찬실이가 돌봄을 주는 곳이다. 할머니와 서로 기대어 쉬고, 소피의 집에서 다른 이를 돌보며 다시 일어선다. 받는 방향과 주는 방향이 오가는 사이에서 사람은 조금씩 회복된다.
현실에서 우리 삶의 수많은 이사 역시 자발적이기보다 비자발적인 흐름에 밀려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보여주는 공간들은 말해준다.
설령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났을지라도, 스스로를 온전히 맡기고 고민할 수 있는 한 평의 공간과 함께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꿈꿔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공간의 크기가 곧 패배를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평수만이 아니라, 그 공간을 채우는 관계라는 희망이 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