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이면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을지로 4가 역에서 내린다. 크고 작은 회사들이 밀집한 지역이라 역내는 사람들로 붐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여행객들도 눈에 띈다. 나는 출구로 빠져나와 건물 사이를 유유히 지나다 카페에 들른다.
"136번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키오스크로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포장 매대에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문한 손님들의 음료로 북적인다.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아이스 음료를 주문한다는 것이다.
여름이 왔다. 무시무시한 계절이 도래했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언제부턴가 '덥다'는 표현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어려워졌다. 가뭄으로 댐의 수문을 개방하듯, 마른 전신으로 땀이 쏟아지는 아연실색의 순간을 외출할 때마다 경험하게 된다.
고온다습한 이 계절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여름휴가일 것이다. 돌아보면 여름휴가를 혼자서 보낼 때가 많았다. 혼자 제주 올레길을 걷거나, 평대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정으로도 떠났으며, 강원도로 한 달 살기를 다녀오기도 했다.
처음 여름휴가를 떠날 때는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한 시간 뒤에는 어디에 가고, 삼십 분 뒤에는 무엇을 먹고. 언제부턴가 빼곡하게 채워진 계획표에 숨이 막혀왔다. 회사에서 작성해 온 To-Do-List처럼 반드시 먹어야 하고, 들러야 하는 무언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생활로 지쳐 휴가를 떠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만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바다멍을 때리고, 느지막이 걷고, 배고플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야말로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행. 이것이 나의 삼십 대를 관통하는 여행 콘셉트이다.
"괜찮은 매물을 발견해서 당일에 덜컥 계약부터 했어!"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 생활을 하며 한 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치열하게 살아오던 친구는 문득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작업실로 쓸 만한 공간을 매물로 우연히 발견했고, 그곳을 둘러보며 글을 쓰는 나, 글을 쓰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나, 지인을 초대하여 평안과 안온을 나누는 우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광안리에 작업실을 차린 친구의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부산과의 인연은 부모님과 명절에 다녀온 1박 2일 패키지여행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서울로 돌아오던 날에 경주 투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어떤 순간을 경험하게 될까?' 기대하며, 정한 거라고는 숙소와 돌아오는 티켓이 전부인 여행이 시작됐다.
부산역 광장으로 나오자 진한 여름이 닥쳐왔다. 바닥으로 떨어진 땀방울이 순식간에 마를 것 같은 바싹한 더위가 엄습했다. 신호등 앞에서 들려오던 경적 소리, 인파가 넘치는 정류장. 날씨도, 소리도, 사람도 기분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도착지는 부산 코엑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의 마지막 날이라고 친구는 알려주었다.
"여기! 여기!" 직선적이면서도 우렁찬 목소리가 전시실 앞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친구가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친구와 남편, 자녀가 함께 있었다. 처음 만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마주친 적 있는 친구의 남편에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2박 3일의 일정을 친구네 가족과 대부분 같이 보냈다. 첫날은 페어를 관람하고, 저녁으로 돼지 국밥을 먹고 헤어졌다. 두 번째 날에는 아침부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닭볶음탕을 먹었다.
"맛이 어때요?" 친구가 물었다. "맛있는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나는 대답했다.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며 감도는 어색한 기운을 없애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빨라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숙소는 괜찮은가요?" 친구 남편은 물었다. 경치도 좋고 내부도 쾌적해서 지낼만하다고 나는 대답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시시콜콜했다. 연애는 얼마나 했는지, 육아는 어떤지, 회사 생활은 할 만한지 같은 주제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대화가 거듭될수록 음식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부산을 여행할 때 어디를 보면 좋은지, 나를 위하는 반응이 쌓여갔다. 부족하다고 하면 무엇이라도 더 내어줄 것 같은, 네이버 지도로 걷기 좋은 코스를 차근히 설명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며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새부터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고, 침묵을 억지로 깨지 않으려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오늘 안 마신 걸 보면 오빠를 데려다주려고 그런 것 같아요" 차를 타러 이동할 때 친구는 말했다. 그가 운전하는 차에 모여 탄 우리는 두 살 배기 아이가 하는 옹알이를 다 같이 따라 하며, 우스꽝스러운 서로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해운대 바다로 향했다.
"안녕. 삼촌 기억해 줘" 의미심장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친구네 가족과 멀어져 갔다.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걸어가는 일정은 이번 여행에서 나만을 위해 급조한 사색의 순간이었다. 밤이 되어도 후덥지근한 거리. 한 여름, 부산의 해변은 해가 저물어도 뜨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찰나. '나이가 먹었나?'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분명 땀이 안 나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등이고 허벅지고 가리지 않고 땀이 샌다. 예전 같았으면 해변가를 하염없이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이버 지도를 수시로 켜며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몇 분 걸리는 수시로 확인하는 내가 광안리 해변에 있었다.
여름 한낮, 정수리를 달구는 뜨거운 햇볕을 '오히려 좋아' 생각하며 걷던 젊음이 줄어든 것 같았다. 또한 여행지에서 나는 '안녕하세요', '주문할게요', '감사합니다' 같은 어휘만 사용해 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친구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인지 촘촘한 대화가 이어졌다.
친구네 가족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들이 베푸는 호의에도 나를 스스로 작게 만들던 부정적인 생각은 '어떠한 조건 없이 환영받는다'는 믿음으로 바뀌어갔다. 움츠러들어 있던 나는 제법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날씨도, 소리도, 사람도 영원하지 않다. 여름이 이토록 어마무시하게 변모할지 몰랐다. 소리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리고, 사람은 내,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혼자서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도, 누군가 함께 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마저 든다.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던 내가 어플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들러 컵홀더에 꼽힌 영수증을 확인하고 바로 가져가면 된다. 커피가 제작될 때까지, 어플로 먼저 주문한 사람들의 음료가 먼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주문 번호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빼지 않아도 된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일상에서의 경계이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경험은 즐거울 수 있겠다고.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혼자가 되어야만 살 것 같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