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마음을 듣고 있노라면

by두근거림

위기에 봉착했다. 거쳐야 할 과제들이 생겼다. 스마트 워치에 반사되어 움직이는 형광등 불빛에도 소스라 치게 놀라는 나다. 소심하고 예민한 나의 동공을 확장시킬 만한 어마무시한 과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네가 사는 집, 세입자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누나는 말했다. 집주인에게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미리 통보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그때가 2월. 계약 만료는 9월.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앞으로 이만큼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할 테지만,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이사 가기로 결심했다고 집주인에게 말했다.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는 대답했다. 담담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간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계약이 끝나기 전에 꼭 말해달라는 말을 더했다.


부동산에 전세 매물을 내놓기 시작한 게 3월이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아직은 4월, 여전히 5월, 어느새 6월, 이제는 7월이다. 집주인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야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구해질 줄 알았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청소를 한 3월의 어느 주말이 무색하게 아무도 발길을 내지 않는다.


이사를 가려고 결정한 날짜는 9월 30일.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날이자, 당첨된 장기미임대전세주택에 입주를 희망하는 날이기도 하다. 쌍문동 산자락에 위치한 새집은 주차난이 예고되지만 내부 환경이 혼자 살기에 더없이 쾌적했다. 이사 갈 집도 정해졌고, 날짜도 다가오지만, 새로운 나날이 장면들로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면접 결과를 또한 기다리고 있다. 만약,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열흘 뒤에 계약이 만료된다. 그 사이에 하던 업무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찾아야 한다. 면접 결과는 면접관들의 손에 달려 있다지만,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구인 공고를 눈여겨보기 시작해야 한다.


나의 힘으로는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진행 중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맞추어 내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알고는 있지만 쉽지 않다. 누군가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 다정하고 능력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 문제를 순식간에 없애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겪어 나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현실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러나, 피하고 싶다. 이사와 이직이 떠오르지 않을 만한 순간만 경험하고 싶다. 현실이 아닌, 공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다.


piano-349928_1920.jpgImage by PublicDomainArchive from Pixabay


회피와 의존의 경향은 성인이 된 이후로도 삶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준비한 스펙이라고는 슬롯복지사와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이 전부였다. 첫 온라인 게임에서는 사백만 원 되는 회사 예산을 쓰는 게 두려워서 최종 시안까지 확인한 캠페인 바카라상을 결제하지 못하고 퇴사했다.


두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는 '씨발'이라는 욕까지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상사에게는 여전히 잘 보이려 했고, 만족스러워할 만한 직원이 되려고 노력했다. 세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는 이명이 오는 상태에서도 고객에게 친절히 응대하려고 했다. 전화로 문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이었으므로, 처음 설명하는 것처럼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를 다루지 않는 행동 방식은 살아가는 내내 불편감을 자아냈다. 실패가 두렵더라도, 갈등이 예상되더라도, 고객에게 어떻게 비칠지라도 캠페인 바카라상을 결제했더라면, 상사에게 불쾌함을 드러냈더라면, 고객에게 덜 친절히 응대했더라면 당장은 불편했을지라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래 근속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번째 온라인 게임까지 경험할 수 있었던 데는 변화가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색을 하게 되었다. 세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 한쪽 귀에는 수화기를 대고, 반대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기 시작했다. 때로는 경직되고, 때로는 날 선 고객의 목소리가 피아노 반주와 함께 들려오게 되었다.


싱잉볼 소리를 들으며 심호흡을 했다. 산바카라을 하며 자연이 주는 경치에 매료되었다. 과거에는 여행처럼 특별한 순간에 경험할 수 있는 이완된 상태가 일상 도처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오전과 오후를 잇는 점심시간에 주로 사색을 즐기게 되었다. 감상의 순간들은 사진으로도 일부 남아있다.


네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 맞이하는 사색의 순간


가을에 찍힌 것으로 (가을)추남이라는 별명을 선사한 사진이다. 이곳은 인턴부터 경력을 시작하여 전임 상담원, 퇴사 후 재입사까지 경험한 이력을 남긴 회사이다.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낀 문제들도 있었고 빠르게 판단하여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괴로울 수밖에 없었겠다는, 없겠다는 말을 사색하는 내가 들려주었다.


다섯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 맞이하는 사색의 순간


회사 중정에서 찍힌 것으로 관종이라는 별명을 선사한 사진이다. 이곳은 추남으로 근무하던 온라인 게임에서 퇴사하고, 재입사하기 전 시기에 근무했던 회사이다. 심리상담을 신청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그들이 원할 때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지만, 바카라임져줄 수는 없고, 주어진 자원에서 그들의 고유한 어려움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을 하자'는 가짐을 사색하는 내가 들려주었다.


여섯 번째 온라인 게임에서 맞이하는 사색의 순간


회사 앞 벤치에서 찍힌 것으로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로소 거듭난 사진이다. 이곳은 현재 무기계약직 전환의 기로에 놓인 회사이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로부터 벗어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기 위해 찾는다'라고 그럴싸하게 적었지만 햇살이 슬며시 비치는 배경에 머물며 손가락과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미소 지어지는 순간이 그저 좋다. 이내, 충만해진다.


글을 쓰는 중간, 중간에 사색하던 나는 안다. 이사를 위한 다음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한다. 부동산에 매물을 보러 오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집주인에게 계약이 만료되는 날에 나갈 거라는 메시지를 다시 전달해야 한다. 무기계약직 전환 결과를 기다리며 새로운 온라인 게임을 찾아보고, 지원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들을 회피와 의존으로 해결하려는 나의 상태를 인식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과도해질 때, 나는 익숙한 과거의 대처 방식을 꺼내든다. 스스로 문제를 다루지 않고,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다르다. 그간의 삶이 나를 증명한다. 나는 문제를 외면하고 싶었으나, 미루기도 하였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욕구, 소망, 결핍, 좌절, 충동, 느낌, 감각처럼 내면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았다. 무너져 있던, 그러나 필사적이었던 과거의 나와 사색을 통해 접촉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과거의 나에게, 사색하는 나는 우리를 위한 최고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잘 나서 내면과 일치되는 듯한 상태를 이따금 경험하게 된 것은 아니다. 위 사진들은 컨셉샷이 아니다. 사색하는 나를 우연히(?) 발견한 동료들이 찍어준 것이다. 돌아보면, 주체적 삶을 위한 순간마다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곁에 있었다.


사랑받고 있었다. 사랑에 목마르다고 생각했던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었다. 목마른 한 때를 떠올리며 물을 더 마셔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다. 사랑해 가고 있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미울 때가 여전히 있지만, 더 이상 사랑받기 기다리는 수동적인 내가 아니다. 나를, 우리를 나는 점차 사랑하고 있다.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금요일 오전에 누군가 집을 보러 온다고 한다. 무기계약직 전환에 합격했다. 혼자서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빛날 수 있지만, 음울한 구석까지 비추지 못한다. 이제는 알거나, 여전히 모르는 누군가의 사랑 덕분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향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다. 환영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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