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미워 보일 때가 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유독 초라해 보인다. 선명해진 팔자 주름과 굵어가는 턱선. 계약 만료를 앞둔 온라인 게임과 집.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태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생각이 유독 깊어질 때면 '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으로 치닫는다. 그러다가도 하루가 지나면 내리막이 보인다. 오르막으로 점철된 인생처럼 보였는데. 새로운 날이 밝자 또 다른 감정이 밀려든다. 달라진 건 없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살짝 틀어졌을 뿐이다.
사람이 마주 지나가면 어깨가 닿을 것처럼 비좁은 도보. 사람들의 옷깃이 쉴 새 없이 스치는 출근길. 어느 할머니의 걸음을 따라갔다. 할머니는 하얀 도라지꽃이 연상되는 벙거지 모자. 한지를 곱게 다린 것 같은 상의. 자녀가 버린다는 걸 극구 말리며 챙겨 온 듯한, 손주의 학원 이름이 적힌 진녹색 가방. 발목이 훤히 보이는 반스.
할머니는 제 걸음으로 걸어가는 듯했다. 누가 지나가도, 뛰어가도 서두르지 않았다. 할머니의 초연한 걸음을 나는 따랐다. 고속도로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쏘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선다. 고개가 앞으로 쏠린다. 불편하다는 감각이 엄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걸음을 고이고이 따라가다 보면, 할머니의 세계가 나에게 펼쳐진다.
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고, 손주를 얻고, 이 순간을 걸어간다. 살아가고 있다. 뒤따르는 내게 할머니의 걸음과 호흡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때도 있지'하며 말을 건네는 것 같다.
할머니를 계속 따르고 싶다. 걸음이 멈추는 곳에 봄꽃 가득한 평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유로웠던 만큼 서둘러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고개가 쏠리지 않는다. 어깨에도, 정강이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걸어간다. 간다. 가고 있다.
불안정한 세상 속으로, 흔들리는 걸음으로,
이 순간을 다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