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기록하는 이유

by꾸록

한동안 나는 기록을 일종의 성과표처럼 여겼다.

오늘 무엇을 해냈는지, 몇 개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확인하는 용도로 노트를 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 있었다.

별다른 성과가 없는 날에는 아예 기록을 건너뛰는 것이었다.


바쁘게 무언가를 해낸 날은

뿌듯한 마음으로 몇 줄이고 적어 내려갔지만,

그냥 흘러가듯 보낸 날은 노트를 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적을 게 없다는 생각,

아니 정확히는 적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기록은 잘 보낸 하루에게만 허락된 특권 같은 거라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달 그렇게 기록하다 보니 이상한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이어리를 넘겨보면 유독 며칠, 혹은 일주일씩 텅 빈 페이지가 나왔다.

처음엔 그냥 바빠서 못 쓴 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떠올려보니

그 빈 페이지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혹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고 느낀 날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금 서글퍼졌다.

내 기록은 결국 내 삶의 일부만을 남기고 있었던 거다.


성과가 있었던 순간만 남고, 힘들었던 날,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날, 그냥 멍하니 하루를 흘려보낸 날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조금씩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도 억지로라도 한 줄을 적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라고 적는 것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그 문장을 적는 것조차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그 한 줄이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면,

그 안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전날 무리했던 몸이 쉬어야 했던 날,

마음이 지쳐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날,

그냥 그런 하루가 필요했던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쉬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스티커로 다이어리를 마구마구 붙인다)


이제는 안다.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하루를 재단하기 시작하면,

결국 삶의 절반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는 것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날도 분명 내 삶의 한 조각이고,

그 조각들이 모여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완성된다.


강사로 15년을 보내며 늘 성과로 평가받던 삶을 살았던 나에게,

이 깨달음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하루를 무언가 해낸 날과 못 해낸 날로

나누는 습관에서 벗어나고 나니,

오히려 기록하는 일 자체가 훨씬 편안해졌다.


잘한 날도, 아무것도 안 한 날도,

그저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도 노트를 편다.

그리고 그날의 나에게, 오늘도 여기 있었다고 짧게 적어준다.

그 한 줄이면 충분하다.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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